오피니언 사내칼럼

쿠바 미사일 위기





인류 멸망 일보 직전까지 갔던 이야기. 54년 전 오늘 미국 지도부에 비상이 걸렸다. 신빙성 낮은 첩보로 여겼던 ‘쿠바 내 소련 미사일 기지 건설’이 사실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미 공군의 고고도 정찰기 U-2기가 촬영한 항공사진에는 소련 미사일 기지 현장이 뚜렷하게 담겨 있었다. 비상 라인을 타고 이 사실을 보고받은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10월14일 즉각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군의 이어지는 보고에 경악했다. 엄청난 위력의 핵무기가 반입됐던 것이다.


소련이 쿠바에 건설하던 미사일 기지는 모두 9개소. 최대 2.3메가톤(히로시마 원폭의 153배)의 위력을 가진 SS-4, SS-5 중거리 전략탄도탄은 2,080~3,700㎞를 날아 인구가 밀집지역인 미국 동부와 중부를 순식간에 쑥밭으로 만들 수 있었다. 발사 기지가 미국의 턱 밑인 쿠바에 있으니 대응할 시간도 없이 당하게 생긴 판. 미국으로서는 위기 중의 위기였다.

소련은 두 가지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첫째는 쿠바에 대한 방위 약속. 피델 카스트로 쿠바 수상은 1961년4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주도하는 침공 사태(피그스만 침공 사건·쿠바 망명군이 미 공군의 제한적 지원을 받아 쿠바에 상륙했으나 쿠바 군민에 의해 격퇴됐다)를 겪은 뒤 소련에 강력 요청, 군사협정을 맺었다. 미국의 침공에 떨던 쿠바는 전략 무기의 반입을 반겼다.

두 번째 이유는 전진 배치된 미국 핵무기에 대한 맞대응 차원. 영국과 이탈리아는 물론 소련과 국경을 맞댄 터키에 미국제 주피터(사거리 2,410㎞·탄두 위력 1.45메가톤) 핵 미사일을 배치한 데 대해 맞불 작전이었다. 마침 소련의 핵 미사일 보유량이 미국보다 떨어진다는 이른바 미사일 갭(missle gap)을 메우려고 역량을 쏟아 붓던 상황. 소련은 쿠바의 요청을 덥석 받아들였다.

국가적인 위기의 순간에 모인 미 행정부와 군의 수뇌부는 난상 토론을 펼쳤다. 일부 장성들은 쿠바를 넘어 소련까지 폭격하자는 강경론을 들이밀었다. 격론 끝에 케네디 행정부는 네 가지 선택지를 추렸다. ①소련 미사일 철수를 위한 외교적 노력 ②미사일 기지에 대한 제한적 공습, ③쿠바와의 전면전, ④해상봉쇄. 케네디는 온건책인 ①번과 ④번을 골랐다. 외교적 노력과 해상봉쇄.


미국 대통령이 TV 카메라 앞에 서서 미사일 위기와 해상봉쇄책을 발표했을 때 세계가 떨었다. 케네디는 소련의 미사일 기지 건설은 무력 도발이며 공사를 강행한다면 선전포고로 받아들여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공식 성명을 내놓았다. 제3차 세계대전이 위협에 숨죽인 세계인들의 시선은 카리브해로 쏠렸다. 핵무기와 건설자재를 적재한 소련 수송선과 미국 함대의 조우. 미국 함대의 봉쇄에 막힌 소련 수송선단은 멈칫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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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10월27일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미 공군의 U-2 정찰기 한 대가 쿠바군이 운용하는 소련제 대공미사일에 맞아 격추되고 조종사도 죽었다. 미국 강경파들은 즉각적인 보복 폭격을 외쳤다. 전면전 주장도 나왔다. 케네디 대통령은 강경론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입을 열었다. ‘미국은 결코 물러서지 않겠지만 최소한 내일은 공습이 없다.’

세계인들이 한숨 돌릴 즈음, 소련에서 메세지가 날라왔다.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미사일을 철수할 수 있다.’ 소련은 10월28일 철수를 발표하면서 위기는 고비를 넘겼다. 쿠바로 향하던 16척의 소련 수송선단은 항로를 돌렸다. 카스트로가 반발했으나 소련은 11월 초부터 쿠바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해상봉쇄를 풀었다. 쿠바에 전개한 핵 폭탄 장착 폭격기도 소련으로 돌아갔다. 미국은 소련과 비밀 협상에 따라 터키에 전진 배치한 핵 미사일을 소리 없이 철수시켰다.

인류는 멸망의 위협에서 벗어났지만 용기와 결단으로 위기를 극복한 주역인 케네디는 암살당하고 흐루시초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실각하고 말았다. 최소한 국지전이라도 원했던 미국과 소련 양국의 군부와 군수산업체의 불만을 샀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끊이지 않는다. 과연 케네디와 흐루시초프가 전쟁을 피했기에 죽거나 권좌에서 밀려났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점은 위기의 순간에 리더십이 발휘됐다는 사실이다.

미국 대통령과 소련 공산당 서기장 뿐 아니라 작은 영웅도 적지 않았다. 소련의 핵 잠수함 한 척은 미국 함대에 포위 당하자 평소 지시 받은 대로 핵 어뢰를 발사관에 넣었다. 장교 3인의 암호 코드를 합쳐 미국 함대를 일거에 격멸할 수 있는 핵 어뢰를 발사하려는 순간, 부함장 바실리 아르키포프가 나섰다. ‘이걸 쏘면 바로 3차 대전이다. 좀 더 기다려 보자.’

쿠바 미사일 위기 54주년, 과거를 반추하는 심정이 편치 않다. 한반도의 위기는 날로 고조되고 방향은 오지 한가지 뿐이다. 구조적으로 선택의 폭이 극히 제한된 탓도 있지만 더 아쉬운 게 있다. 우리에게 다양한 집단사고를 이끄는 리더십이 있는가. 파멸의 순간을 비켜갈 수 있는 이성을 갖춘 군인은 얼마나 되나.

세월이 흘러 미국과 소련 양국의 기밀 문서가 해제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쿠바에 건설된 미사일 기지에서 발사할 수 있었던 소련의 핵 미사일은 미국의 추정보다 훨씬 많은 162기에 달했다. 소련의 미사일은 위기가 끝나고 지구촌이 평화상태를 되찾은 후에도 일부는 쿠바에 남아 있었다. 케네디가 안일하게 판단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만약 케네디나 흐루시초프가 강경론자들에게 밀려 전쟁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숨을 쉬고 있을까. 최악의 평화를 위해 정당한 전쟁을 포기한 리더십에 지구촌은 빚을 지고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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