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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세이] '걷기왕'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최상진의 리뷰에세이] 영화 '걷기왕'

명절에 만난 친척 동생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변리사라고 답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란다. 정작 변리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는 아이를 앞에 두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한다고 일장연설을 쏟아냈다. 아이 엄마아빠의 눈초리에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아이들이 꿈이 곧 직업이어야 하는 시대다. 어른들의 시선에 맞춘 직업을 갖기 위해 모든 아이들은 한결같이 국영수에 집중한다. 똑같은 공부가 똑같은 꿈을 만들어내고, 20대 초중반에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승부가 갈리기 전에 포기하면 낙오자가 된다. 10년 전은 대기업, 지금은 공무원. 과연 몇 퍼센트나 자기의 꿈으로 위장한 부모의 꿈을 이뤄드릴 수 있을까.






하루에 만보 이상은 족히 걸어다닐 법한 ‘걷기왕’ 속 만복이도 걷는 것만 빼면 별반 다를 것 없는 소녀다. 아이들에게 맞춤식 꿈을 찾아주는 것을 사명감으로 생각하는 담임선생님 덕에 경보를 시작했지만, 아침부터 걸어다녀 피곤한 만복에게 또 걷는 것은 귀찮기만 할 뿐이다. 아빠도 관두라고 하고, 텃세도 심한데 굳이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잠깐 그만두기도 한다.

공부는 싫고 운동은 쉬울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그렇지만도 않다. 죽을 듯이 연습하는 선배를 따라 한다고는 해봤는데 정작 대표선발전 당일 버스를 탔다가 그만 컨디션이 무너지고 만다. 그래도 하늘이 도왔는지 우여곡절 끝에 대표가 된 만복은 생애 처음으로 가슴 뜨거워지는 열정의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는 멀리 나가지 않는다. 평범한 여고생의 일상에 운동신경 좀 있다면 한번쯤 겪어봤을 듯한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정도에서 전개된다. 만복의 고민과 선택, 열정이 보통의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꾸준히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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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겨냥한 만큼 억지갈등도 넣지 않았다. ‘걷기왕’에는 청소년 영화의 단골소재인 폭력과 왕따 대신 ‘여자’를 강조하는 아버지와 ‘꿈’을 강요하는 선생님이 악역 아닌 악역으로 등장한다. 어른들은 지극히 일반적인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조언한다. 반면 영화는 이를 아이의 시각으로 받아들이며 ‘편견에 갇힌 선의가 꿈을 꿀 수 있는 고민 자체를 막을 수 있다’고 경계한다. 큰 갈등 없이도 이야기가 끝까지 흘러갈 수 있는 힘은 여기에 있다.

아이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 극복해낸다.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해본적 없는 만복도, 육상에 모든 것을 걸었던 수지도, 일찌감치 가늘고 긴 미래를 위해 9급공무원을 택한 지원도 어른들의 도움없이 자신의 미래를 그리며 한걸음씩 걷는다. 나에 대해 생각하고 한번 맞부딪혀 깨져보고 한 단계씩 성장하는 ‘그 어려운 것’을 아이들은 해낸다.



대학 졸업반 시절 교생실습에서 뜻하지 않게 반에서 1등하는 학생을 상담한적 있다. 아이는 헤어디자이너가 되고 싶은데 부모님은 의대에 진학하기를 원한다며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그 당시 아이에게 ‘훗날 상황이 바뀔지도 모른다. 네가 하고싶은 일이 달라지면 그때 대응할 수 있도록 공부는 놓지 말라’는 꼰대같은 대답을 해줬던 기억이 있다.

8년 전 ‘걷기왕’이 있었다면 그와 같은 어리석은 대답을 해줬을까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꿈은 직업의 선택일 뿐. 지금은 하고싶은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림을 그려보라’는 대답을 부모와 선생님이 아닌 영화가 해준다는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자 감사한 일이다. 20일 개봉.

최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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