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최초의 카미카제





1944년10월21일 동틀 무렵, 필리핀 레히테만 인근 해역. 함포 사격을 위해 해안으로 향하던 연합국 함대(순양함 4척, 구축함 6척)를 일본 해군 항공대 강습편대가 덮쳤다. 일본군 조종사들은 근접 접근해 폭탄을 떨구기로 유명했지만 이날만큼은 여느 때보다도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5인치 함포와 40㎜ 기관포, 20㎜ 고속기관포로 구성된 강력한 대공화망에 떨어지고 떨어져도 한사코 근접해왔다.


아침 6시15분께, 일본 해군의 아이치(愛知·Aichi) D3A 급강하 뇌격기 한대가 대공 포탄의 탄막을 뚫고 연합국 함정에 꽂혔다. 피습 함정은 오스트레일리아(HMAS Australia). 1925년 건조된 구형함이었으나 길이 180m, 배수량 1만3,450t짜리 중순양함으로 호주·뉴질랜드 해군의 기함이었다. 일본기는 함교 위 통신 구조물을 처박았다. 다행히 탑재한 200㎏ 대형 폭탄은 불발돼 함체는 큰 손상을 입지 않았지만 운동에너지만으로 함장을 포함 30명이 죽고 3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호주 해군 사령관 콜린스 제독도 부상 후유증으로 죽었다. 계획에 의한 자살 공격, 이른바 카미카제(神風) 특공이 시작된 순간이다.

카미카제의 첫 격침 기록은 24일 나왔다. 1,120톤급 예인선이 가라앉았다. 이튿날에는 7,800톤짜리 호위 항공모함 세인트로호가 격침됐다. 양측이 닷새 동안 모두 250만톤이 넘는 함정을 동원해 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으로 꼽히는 ‘레히테만 해전’에서 일본은 완패했어도 자살공격으로 5척 격침에 23척 대파, 12척 파손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고무된 일본은 자살공격을 전선 전역으로 확대시켰다. 오키나와 전역에서 카미카제는 특히 기승을 부렸다.

종전까지 카미카제로 희생된 일본인은 3,812명(미국 자료). 일본은 최대 1만4,009명으로 집계한다. 연합국도 사망 4,907명, 부상 4,824명이라는 인적 손실을 입었다. 정규 항공모함이나 대형 전함 같은 주력 함정은 단 한 척도 침몰되지 않았지만 60척의 연합국 함정도 격침됐다.


일본은 왜 무모한 자살공격에 나섰을까. 애초부터 상대가 못됐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기준 양국의 국내총생산(GDP) 격차가 5.7배. 철강생산 19배, 원유생산 160배로 상징되는 물자와 장비·경제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승승장구하던 초기의 기세가 꺾인 뒤,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상황. 카미카제라는 광기가 나왔다. 막바지 발악은 역으로 종전을 앞당겼다. 패전이 확실해지자 ‘1억 국민 카미카제’를 외치는 일본에 상륙할 경우 최소한 미군 100만명이 희생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일본을 굴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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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카미카제를 반성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오늘날 일본은 비행기와 인간어뢰를 몰고 연합국 군함에 몸을 내던진 카미카제 특공대원 전사자를 최소한 6,271명, 많게 잡아 1만4,009명으로 추산한다. 괌과 사이판·오키나와·유황도 등에서 항복 대신 반자이 돌격(천황폐하 만세을 외치며 우세한 적에게 정면 돌격하는 행위)과 옥쇄(玉碎)를 택한 군인과 시민들을 합치면 그 숫자는 수십만에 달한다. 일본은 이들을 전범의 위폐와 한데 묶어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비롯한 전국의 신사에 모신다. 전범들과 합사를 그토록 반대하는 주변국의 외침은 아랑곳 없다.

카미카제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전쟁 막바지에 대형 전함으로 일본 연안 도시를 맹폭하는 작전을 세웠다가 접었다. 일본 본토에 남은 카미카제로 인한 인명 손실이 클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만일 태평양전쟁이 좀 더 이어졌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광복군의 국내 침투작전이 실행되고 신생 대한민국의 입지도 보다 강해졌을 수도 있었다. 원폭 투하 사실을 접한 김구 선생이 땅을 치고 한탄한 게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보이지 않는 흔적은 더 크다. 종전 후 한반도 이남에 진주한 미 군정은 ‘무시무시한 적이라고 여겼던 일본인’과 그 잔재, 즉 일본군과 경찰 출신 조선인들을 요직에 앉혔다. 중국군을 부패하고 무능한 군대라고 여겼던 미군은 중국군의 도움을 받았던 광복군 출신을 친일파보다 몇 수 아래로 여겼다. 미 군정 시절부터 중용되기 시작한 친일파의 잔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거치면서도 청산되지 못한 채 한국 사회의 갈등 요인으로 자리 잡았다.

전쟁을 일으키고 인간의 목숨을 한낱 도구로만 여겼던 전범 국가 일본과 카미카제의 찌꺼기를 우리 민족이 뒤집어 쓴 셈이다. 역사는 정녕 반복되는 것일까. 미국의 주도와 종용으로 한국과 일본의 군사 협력이 늘어나고 있다. 군대끼리 연합 훈련은 물론 각종 군사협정 체결이 목전에 다가왔다.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된다. 청산과 반성 없이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에게 내일이 있는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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