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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둘리'로 음악감독 첫발… 14년째 연주자들과 구슬땀
철두철미한 운영·안정적 연주… 섭외 1순위 스타감독으로 유명
실제 모습과 닮은 뮤지컬 '오케피'… 인간군상 악기 특징에 맞춰 표현
고령 여성 지휘자는 별로 없어 오랫동안 감독일 할 수 있었으면…
"백조가 우아해 보이는 이유는 쉼 없이 움직이는 다리가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백조의 발, 이것이 무대 아래의 오케스트라."(뮤지컬 '오케피' 중)
이만한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음악이 생명인 뮤지컬. 화려한 무대를 위해 그 아래 좁고 컴컴한 공간(오케스트라 피트)에서는 연주자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최고의 라이브 선율을 선사한다. "지휘봉 끝에 제 에너지가 담겨 연주자에게 전달되고 그들이 이어받은 활기가 다시 무대 위 배우와 객석의 관객에게로 연결됩니다. 하는 만큼 나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정직한 '거울' 같은 것이 바로 제 역할인 셈이죠." 14년째 백조의 발이 돼 무대의 감동을 완성해온 오케피의 선장, 음악감독 김문정(사진). 그가 이번에는 오케스트라 피트의 연주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오케피'를 통해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낸다.
◇음악을 무대화하는 사람="정말 독하게 마음먹었어요." 2015년은 김 감독에게 유독 바쁜 해였다. 마리앙투아네트·원스·영웅·데스노트·엘리자벳·명성황후·유린타운·맨오브라만차·레미제라블·레베카·오케피…. 1년간 참여한 작품만 무려 11편이다.
관객에게 음악감독은 공연 중 뒤통수를 내보인 채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곤 한다. 그러나 한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음악감독의 손길이 안 닿는 곳은 거의 없다.
"음악감독은 음악을 무대화하는 사람이에요. 어떤 배우가 어떤 방식으로 노래하고 그때 연주는 몇 명이 무슨 악기로 할지, 무대 전환을 고려해 템포는 어디까지 조절할지 등을 모두 결정하죠. 배우가 노래를 불편해 할 땐 가사를 바꾸기도 하고요. 이렇다 보니 배우 캐스팅을 비롯한 작품 전반에 관여할 수밖에 없죠."
뮤지컬 하나가 공연되기까지 수개월의 준비가 필요하기에 독기(毒氣) 없이는 이 죽음의 일정을 소화할 수 없다. 최근까지만 해도 낮에는 서울에서 오케피·레베카 2개 작품을 준비하면서 학교(그는 한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생활을 병행하고 밤에는 레미제라블 대구 공연에 참여하는 멀티플레이가 몇 달간 이어졌다.
집에서도 두 딸이 각각 대입, 고입(예고) 시험을 봤다고. 일과 가정에서 큰일을 여럿 치른 그는 "'일 많아도 제대로 해낸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이 악물고 열심히 했다"며 "누군가는 욕할지도 모르지만 올해는 일이 많아 감사하면서도 24시간을 어떻게 쪼개 써야 할지 몰라 무척 괴로웠다"고 털어놓았다.
◇깐깐한 시스템, 섭외 1순위 감독=뮤지컬 업계에서는 김 감독의 이름 앞에 '스타' '섭외 1순위'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비단 왕성한 활동 때문만은 아니다. 매사 꼼꼼한 그의 일 처리는 업계에 정평이 나 있다. 작품 여럿이 겹쳐 고사하면 "공연 첫주까지만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하는 제작사가 있을 정도다.
김 감독은 이런 러브콜에 대해 "나의 오케스트라 운영 방침을 믿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10명의 정단원과 20명의 부단원으로 구성된 '더 엠씨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다. 정단원은 김 감독이 무려 10년에 걸쳐 함께 활동하며 꾸린 정예 부대다. "되도록 대체 연주자 없이 공연하려 하지만 작품이 겹쳐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많아요. 그럴 땐 정단원의 추천과 제 평가를 거친 부단원이 합류합니다. 일단 작품에 들어가면 정·부단원 구분 없이 매주 한 번씩 정기 리허설로 연주를 점검하고 대체 연주자에 대한 관리·감독도 철저하게 하죠." 이렇다 보니 부단원들도 김 감독에게 '식구를 늘려서라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큰 만족감을 안겨주고 있다. 철두철미한 오케스트라 운영과 이를 통한 안정적인 연주가 러브콜의 이유인 셈이다.
◇장난감이던 음악, 자연스레 인생에 녹아=어린 시절 놀이처럼 즐겼던 음악은 자연스레 삶에 녹아들었다. 아니, 그의 인생이 마치 감기에 걸리듯 음악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공무원 집안의 딸 셋 중 맏이. 예술 교육을 따로 받을 만큼 풍족한 형편은 아니었다.
"엄마 지인 댁에 놀러 갔다가 피아노를 보고 동생과 건반을 누르며 놀았어요. 그런데 그 댁 아주머니께서 피아노 뚜껑을 슬쩍 닫으시더군요. 엄마가 절약이 몸에 밴 분이신데 그 모습이 짠했는지 무리해서 피아노를 사주셨어요(웃음)." 피아노를 장난감 삼아 놀던 소녀는 초등학교 고적대를 거쳐 중·고교 합창단 활동을 하며 단장·지휘자를 도맡았다.
음악으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좋았고, 그래서 즐겼다. "고1 때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곡을 카피해 연주하곤 했어요. 교회에서도 마음 맞는 친구들과 팀을 짜 작업도 했고요. 그때 함께한 사람이 가수 유희열, 드러머 오종대랍니다." 이후 서울예대 실용음악과(작곡)에 진학한 김 감독은 선배들과 가수 콘서트나 광고음악 작업의 세션맨을 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그 끝엔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2년 뮤지컬 '코러스라인'의 피아노 반주로 참여했어요. 이전까지 했던 작업이 주로 규격화된 음악이었다면 뮤지컬은 전혀 다른 세계였죠. 그때 처음으로 '뮤지컬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이후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휴식을 취한 그는 1997년 명성황후의 건반 반주를 시작으로 뮤지컬 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꾸준한 작업 끝에 2001년 '둘리'로 뮤지컬 음악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오케피의 선장, 뮤지컬 '오케피'를 만나다=음악감독 직함을 달고 14년간 쉼 없이 달려왔다. 오랜 시간 무대 아래 세상을 경험하며 말 못할 사연도 많이 담아왔다고. "외국에는 연주자 조합이 있어 권리 보호가 잘 돼 있어요. 반면 한국에는 오케스트라를 지원할 기반이 약해요. 연속으로 작품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어요." 오케스트라 피트 생활에 닳고 닳은(?) 장본인이어서였을까. 김 감독은 뮤지컬 '오케피'의 대본을 보고 단숨에 참여를 결심했다.
그는 "작품에 나오는 여러 에피소드가 실제 오케피의 모습과 80~90% 닮았다"며 "'다른 사람이 감독을 맡았으면 화가 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현실감 있고 공감 가는 내용이 많다"고 전했다. 배우 황정민이 연출을 맡은 오케피는 일본 인기 작가 미타니 코우키의 작품이 원작으로 무대 아래 공간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사건·사고를 그린다. 김 감독과 맨오브라만차를 함께한 황정민은 2년 전 김 감독에게 오케피 대본을 준 뒤 수시로 연락하며 음악감독 섭외에 공을 들였다.
"오케피는 공간적인 소재일 뿐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예요. 다양한 인간군상을 악기별 특징에 맞춰 표현한 천재적인 발상이 정말 놀라운 작품이죠. 특정 직업인의 세계가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야기로 관객도 충분히 공감하고 즐길 수 있을 겁니다."
뮤지컬에서 무대 위와 아래,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지키고 선 유일한 존재가 바로 지휘자(음악감독)다. 지휘봉의 무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시절을 지나 지금은 '매일 밤 지휘하지 않으면 병이 난다'는 15년 차 음악감독 김문정.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에 큰 욕심은 없다"며 "주어진 환경에서 그저 열심히 살아가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밝혔다. "할아버지 지휘자는 참 많은데 할머니 지휘자는 없는 것 같아요. 나이를 먹어도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참 행복할 것 같네요."
사진=송은석기자
She i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