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한 계열사 임원들은 최근 비상이 걸렸다. 사장 비서실에서 당초 이달 하순으로 예정됐던 올해 영업 현황 보고를 2주 앞당기겠다고 통보해 오면서 임원들이 일정을 맞추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한 해 성과를 정리하는 영업 보고는 임원들의 승진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이 계열사의 한 관계자는 “가뜩이나 올해 실적도 좋지 않은데다 기한도 촉박해 만족스러운 보고서를 만들기는 힘들 것 같다”며 “다음달 단행될 임원인사를 앞두고 승진 시기가 된 임원과 부장들이 극도로 예민해졌다”고 전했다.
국내 대기업 임원들이 연말 인사 시즌을 앞두고 바짝 긴장하고 있다. 임원들의 직위는 ‘파리 목숨’에 비유될 정도로 불안정하지만 올해는 유독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게 재계 임원들의 하소연이다.
일부 대기업은 해직 대상 임원들을 대상으로 6일 해고 통보를 시작했다. 통상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사장단 인사가 난 뒤 이어 임원인사가 단행되는 점을 감안하면 일찌감치 인사에 시동이 걸린 셈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언제 인사실에서 전화가 걸려올지 몰라 조마조마한 심정”이라며 “올해는 임원의 20%가량을 물갈이한다는 소문이 파다해 승진 연한에 해당하지 않는 임원도 안심하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재계는 올해 대기업 인사가 여느 해보다 광폭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올 하반기 들어 실적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올 3·4분기 5조2,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내 전년 대비 3분의2 수준으로 수직 하락했다. 갤럭시노트7 단종에 따른 일회성 비용이 반영된 수치이기는 하지만 ‘신상필벌’을 인사의 제1원칙으로 하는 그룹의 경영 기조를 감안하면 대대적 인사가 단행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등기이사 자리에 올라 경영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회사 전반에 이 부회장의 ‘색깔’이 입혀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삼성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예년(12월 첫째주 사장단 인사)과 인사 일정이 달라진 점이 없다”고 밝혔다.
3·4분기 1조원에 간신히 턱걸이한 영업이익(1조681억원)을 낸 현대자동차도 광폭 인사와 더불어 통상 연말에 단행하는 임원 인사 시기를 앞당길 가능성이 있다.
SK그룹은 지난 몇 년 동안 사장단 인사 폭이 크지 않았고 올해 최고경영자(CEO) 세미나가 평년보다 이르게 개최됐다는 점에서 사장단 인사가 11월 하순께로 빨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극도로 불안정한 대내외 경영환경과 저조한 실적을 감안하면 하루라도 인사를 앞당겨 변화에 대한 적응을 앞당기는 게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한화그룹과 현대중공업 그룹은 지난달 평년보다 일찌감치 인사를 마무리하고 내년도 경영계획 수립에 돌입했다.
기업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진행되고 있는 점도 임원들의 불안감을 키우는 요인이다. 롯데그룹의 경우 신동빈 회장이 직접 나서 그룹 컨트롤타워인 정책본부를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현재로서는 정책본부가 어느 정도나 줄어들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각 계열사의 기획·재무 분야 ‘엘리트’가 원대복귀하면서 실질적으로 승진 자리가 줄어들 경우 도미노식의 연쇄적인 인사 후폭풍이 일어날 수 있다.
이밖에 삼성의 미래전략실과 SK의 수펙스추구협의회 등 최고 의사결정 조직도 기능과 규모를 일부 조정해 힘을 빼는 작업이 올해부터 진행될 수 있다는 전망이 재계에서 제기된다. /서일범·이종혁기자 squ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