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관객이 넘었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조선 15대 왕 광해군이 비서실장인 도승지 허균과 독대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독대는 일반에게 글자 그대로 단둘이 만나는 것보다 임금이 다른 사람의 배석 없이 신하와 따로 만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광해’뿐만 아니라 역사를 다룬 TV 드라마나 영화 등 창작물에서 너무 익숙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조선 시대에 실제 임금과 독대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사관(史官)을 두고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기록해 왕권을 견제하던 ‘언론(言論)’이 보장되던 조선의 권력 구조상 독대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히려 임금에게 독대를 요청한 사실만 알려져도 상대 당파에 의해 대역죄로 몰려 죽임을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독대를 멀리하면서 이를 제도적으로 안착시킨 성종 이후에 독대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단 세 차례뿐이다.
효종이 송시열과 북벌을 논의한 ‘기해 독대’와 숙종이 후계문제를 논의한 ‘정유 독대’가 유명하다. 서인과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이 독대 후 현종, 숙종 조까지 권력의 정점에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왕세자 책봉 문제가 단초가 돼 83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는다. 송시열에 사약을 내린 숙종도 여러 차례의 정권 교체(환국·換局)를 거듭하다 죽음 직전 노론 대신 이이명과 독대한다. 이이명 또한 다음 왕인 경종 때 김창집 등 함께 ‘노론 4 대신’으로 당시 집권당인 소론에 의해 사사(賜死)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수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행한 여러 차례의 독대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이 차례로 대통령과 단독 면담했을 뿐만 아니라 ‘독대 진료’ ‘최순실 독대’ 등 박 대통령 특유의 국정운영방식으로까지 비판받고 있다. 이쯤이면 민심도 결국 권력을 등에 업은 최순실 일가의 비리보다 이 같은 일탈적 국정운영에 더 분노하고 허탈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온종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