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1월29일, 제96회 정기국회 본회의가 18개 세법안을 통과시켰다. 만장일치로 통과된 다른 법안들과 달리 유독 하나, 부가가치세법안은 표결을 거쳤다. 재석 176명 중 찬성 128, 반대 47. 여당인 공화당과 박정희 대통령이 지명한 국회의원인 유신정우회는 찬성, 야당인 신민당은 경기 침체 우려를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다.
박정희 정권이 부가가치세 도입을 공식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1973년부터. 유신체제로 장기집권의 틀을 마련한 후 9개 경제부처 장관이 신년 경제운용계획을 발표하면서 1977년까지 부가가치세를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표면적인 이유는 세제 선진화. 영업세를 비롯해 물품세, 직물류세(織物類稅), 석유류세, 전기가스세, 전화세, 통행세(이상 국세)와 유흥음식세(지방세) 등 9개 세목을 하나로 묶었다.
실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세수 증대가 한계에 봉착한 상황에서 조세 저항이 적고 세수 확보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고 믿었다. 야당이 간접세 증대는 빈부격차를 벌릴 수 있다며 반대하고 전국 경제인연합회도 경기 침체 심화를 이유로 난색을 표명했으나 유신 정권은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밀어 부쳤다. 여당 일각에서 총선(1978년 12월) 이후에 도입하자는 논의가 나왔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바뀐 것이라고는 부가가치세에서 거래세로 정해졌다가 다시 부가가치세로 변한 정도다. ‘거래세’라는 세목 신설이 불발된 이유는 6.25 전쟁 당시 서울에 진주한 김일성이 ‘거래세‘를 거뒀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국회 입법절차와 예고를 거쳐 이듬해인 1977년 7월부터 부과된 부가세는 첫해에만 2,415억7,300만원의 세수를 올렸다. 추정 목표 2,100억원을 훨씬 웃돌았던 부가세 세수는 이듬해인 1978년 8,389억원으로 껑충 뛰며 전체 내국세의 37.3%를 차지하는 ’효자 세목‘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3년간의 준비와 예행연습을 반복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재무부의 장담을 비웃듯 각종 부작용이 쏟아졌다. 서울의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부가세 적용 2개월 뒤 ‘부가가치세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며 집단으로 상가문을 닫았다. 유신 정권은 주요 도매시장의 철시(撤市) 사태는 힘으로 제압, 시장 문을 열었으나 뛰는 물가에는 도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공공요금 인상만으로도 물가가 두 자리수로 뛰던 시절, 상인들이 10% 세율만큼 가격을 올리는 통에 전반적으로 물가가 크게 올랐다. 부동산은 더욱 요동쳤다. 한 달 사이에 서울 주요 지역 아파트가 30%나 폭등했다. 여의도 지역의 아파트 값은 1년 동안 3배 이상 뛰었다. 아파트 파동과 30~40%의 물가 앙등, 소비 부진은 1978년 총선에서 집권 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에서 1.1% 뒤지는 정치적 이변으로 이어졌다.
부가가치세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선거 패배 요인으로 꼽히면서 부가가치세제 도입의 주역이던 남덕우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용환 재무부 장관,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옷을 벗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실물 경제와 수출을 담당하는 상공부 장관 만 빼고 경제부처 장관을 모두 바꿨다. 부가세 도입의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초래한 원인으로도 손꼽힌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 사태 직후 공화당에서는 부가가치세 폐지와 도입을 주도한 담당자 문책론이 나왔다.
유신 정권을 이은 신군부의 인식도 비슷했다. ‘5공 정권의 설계자’로 불리는 허화평 전 의원의 저서 ‘지도력의 위기(2002)’에 나오는 평가. ‘유가 폭등과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 투자가 경제 전반을 압박하는 와중에 1976년 정부가 도입한 부가가치세가 기업은 물론 중소 영세상인과 일반 소비자들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일반 국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긴장과 조세 불만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폭발한 것이 부산, 마산지역에서 발생한 부마 사태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에 대한 의원직 제명을 도화선 삼아 대학생들이 시작한 유신 정권 반대 시위는 바로 세를 불렸다. 일반 시민들과 상인들이 합세한 시위대는 서부산세무서에 불을 질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에서도 유신 말기의 경제위기와 부가가치세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강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민주당 소속 김종인 의원(현재는 더불어 민주당)은 종합부동산세 도입을 반대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부가가치세를 도입했고, 선거에서 패배했는데도 수습방안보다 강권으로 나가다가 부마항쟁이 촉발돼 결국 유신 정권이 무너졌다.’
반대의 시각도 있다. 강만수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2005)’에서 ‘부가세 도입으로 세입도 물가도 모두 잡았다.…(중략)… 박정희 대통령 시해의 주요 원인이 유신체제와 부마사태인 것을 세상이 다 안다. …(중략)… 10.26 사건의 원인을 부가가치세로 돌리는 방향 착오의 공화당은 12.12 사태를 일으킨 젊은 군인들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과연 어떤 해석이 맞을까. 초기의 조세 저항과 부작용에도 부가가치세는 5공 정권에서는 한때 전체 세수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주요 세목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2015년 부가가치세로 들어온 내국세는 54.2조원으로 전년의 57.1조원 보다 줄었으나 여전히 주요한 세목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문제는 인상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재정 상태가 나빠져 야당에서도 부가가치세율을 올리자는 방안이 거론되는 판이다.
담배 가격 인상 같은 꼼수보다 법인세나 부가가치세를 인상하는 정공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없지 않지만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덜컥 세금을 올리면 정권의 안위까지 영향 받을 수 있는 조세 저항도 저항이지만 경기 흐름에 타격을 줄 수도 있다. 불황의 초입에서 영업세를 올리는 통에 ‘잃어버린 20년’에 빠졌던 일본의 사례가 남의 일 같지 않다. 걱정이 앞선다. 어느 누가,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던 경제 여건과 재정 상황이 녹록하지 않으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