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정부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정치지형마저 ‘여소야대’인 상황에서 정부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규제프리존특별법’, ‘노동 4법’ 등 주요 법안의 국회 통과를 지레 포기한 분위기다. 외환위기 끝자락인 지난 2001년에는 달랐다. 정치지형은 여소야대로 지금과 같았지만 관료들은 더 악착같이 정치권 설득에 나섰다. 국가 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사명감으로 야당 의원과의 1박2일 합숙토론도 불사했다.
30일 정부의 한 관계자는 “노동 4법은 재계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서비스법은 최순실 단골 병원인 차병원을 지원하기 위해 통과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마당에 우리가 어떻게 더 밀어붙일 수 있겠느냐”며 “정부가 서비스법, 규제프리존법, 노동개혁 4법을 포기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이들 법안이 현 정부 집권 기간 내에 통과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경제관계부처 수장들 역시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여소야대의 벽을 직접 뛰어넘으려 하기보다는 벽이 저절로 허물어지기를 바라며 그저 외치고 있는 모습이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나 기업을 방문하면 으레 인사말처럼 “체계적인 서비스 산업 육성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의 조속한 입법이 필요하다. 노동 4법, 서비스법이 통과돼야 일자리가 만들어진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노동개혁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로는 강조하지만 힘이 실려 있다고 느끼는 의원이나 공직자는 별로 없다.
하지만 시계추를 2001년으로 돌려보면 당시 경제사령탑들은 달랐다. 2001년은 미국의 정보기술(IT) 산업 불황으로 성장세가 둔화된데다 국내에는 대우·현대그룹 등 기업 구조조정 현안이 쌓여 있었다. 국회는 공전을 거듭하면서 정부 정책을 뒷받침할 재정 관련 3법에 대해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그해 5월 야당 대표였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찾았다. 그는 진심을 다해 이 총재를 설득했고 결국 여야 경제통 의원 12명과 경제부처 장관 5명의 1박2일 합숙토론을 성사시켰다. 합숙토론에서도 감정대립으로 우여곡절이 없을 수 없었다. 소주폭탄주 7잔을 돌린 뒤 허심탄회한 대화를 이어간 끝에 △기업구조조정촉진법 입법 △공적자금 회수 극대화 △재래시장활성화특별법 제정 △국가채무 및 기금운용 투명화 △기업 활동 행정규제 완화 △주택산업 및 첨단산업 육성 등의 6개 항의 합의문이 도출됐다. ‘1박2일 합숙토론’은 경제정책에 있어 여야의 협조를 이끌어낸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김주훈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석이코노미스트 겸 경제정보센터소장은 “과거 경제관계부처 장관들은 토요일 일과 후 총리 공관에 모여 밤늦게까지 언성을 높이면서도 끝까지 토론해 결론을 내고야 말았다”며 “당시는 그것을 바탕으로 입법도 추진했는데 요즘은 그런 치열함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종=임지훈기자 jhl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