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정경유착 고질병 끊을 기회"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가 말하는 '권력과 기업의 관계'

이 기사는 포춘코리아 2016년 12월 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정치 권력과 재벌의 결탁. 정경유착은 역대 정권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재벌은 박정희, 전두환 정부까지는 정권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납작 엎드렸지만 정권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면서 이권을 챙기는 영악함은 잊지 않았다.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긴 건 군부 출신이 아닌 민간인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문민정부 이후부터다. 이때부터 재벌은 본격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문민정부 이후 박근혜 정부까지 역대 권력과 재벌의 관계는 어땠을까. 이를 되짚어보기 위해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를 만났다. 2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 내내 그는 정치 권력과 재벌의 결탁에 대해 비판했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문민정부 이후 박근혜 정부까지 역대 권력과 재벌의 관계에 대해 비판했다.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문민정부 이후 박근혜 정부까지 역대 권력과 재벌의 관계에 대해 비판했다.


“문민정부 이후 재벌을 제대로 컨트롤한 정권이 하나도 없었어요. 모두가 재벌과 결탁했죠. 재벌과 정치 권력이 합쳐지면 ‘재벌공화국’이 되는 겁니다. 재벌과 결탁된 상황에서는 정부가 머리 싸매고 경제정책을 만들 필요가 없어요. 재벌들이 알아서 하니까요.” 문민정부 이후 역대 정권과 재벌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의 말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Q.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등 이른바 진보정권에서는 재벌 개혁을 주장하지 않았나요? 김영삼 정부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A.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박정희, 전두환 정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 때는 국가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정부가 주도해 국가 산업화를 이끌었죠. 당시 자본력이 없는 기업으로서는 인·허가권과 은행을 쥐고 있는 정부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력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업이 성장하거나 망할 수 있었으니까요. 정치와 경제는 급속히 결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에서도 이런 기조가 유지됐죠. 이때는 1973년부터 시작된 ‘중동 특수(중동 국가들이 넘쳐나는 오일달러를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투자하면서 우리 기업들에게 큰 시장이 열렸던 것을 지칭하는 말)’가 끝난 후 우리 기업들이 국내로 모두 들어온 상태였어요. 내수시장에서 경쟁이 시작된 겁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런 기회를 살려 기업들을 컨트롤했죠.”

- 정치 권력과 재벌의 이해관계는 박정희 정권을 거쳐 전두환 정권에 이르는 1987년까지 지속됐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이런 관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치 권력과 재벌은 ‘밀월시대’를 즐겼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치 권력과 재벌의 밀월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는 재벌의 힘이 정치 권력과 대등한 수준으로 커지는 것을 견제했다.


Q. 문민정부 때로 돌아가보죠. 김영삼 정부는 재벌에 대해 좋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A. “김영삼 대통령이 재벌을 견제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 배경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1992년 대선 출마였습니다. 당시 정주영 후보는 김영삼 후보의 가장 큰 적수였어요. 사회적 인지도가 높고 거대 자본을 가진 재벌이 정치 권력에 도전했을 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느낀 겁니다.”

- 정선섭 대표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 초기 단행한 금융실명제 도입, 공정거래법 강화, 중화학공업 중복투자 규제 등이 재벌에 대한 견제 심리로 나온 정책이라고 말했다. 김영삼 정부가 재벌을 대상으로 강경한 견제정책을 이어가자 기업들은 투자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집권 중반부에 사실상 재벌의 역공에 백기를 들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전경련 회장단(재벌 총수들의 모임)을 청와대로 초청해 칼국수 만찬으로 재벌 달래기에 나섰다. 그 후 김영삼 정부는 시장의 반대에도 당시 첨예한 문제였던 ‘삼성그룹의 자동차 사업 진출’을 허용했다. 이 사건은 정치 권력과 재벌 권력의 균형이 변화하는 대표적 사례였다.


Q. 칼국수 회동이 정치 권력과 재벌이 다시 결합하게 된 계기가 됐군요.
A. “집권 2년 만에 재벌 정책이 완전히 선회했습니다. 재벌들이 취하고자 하는 경제적 확장 정책에 대해 정부가 규제를 포기하게 됐습니다. 1994년 말 삼성그룹의 자동차 사업 진출이 확정된 이후에 상당히 많은 산업들이 일제히 재벌들에게 열리기 시작했어요. 중화학공업 중복투자 규제도 풀리기 시작하면서 재벌들이 조선·철강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케이블방송이나 통신산업도 확대했어요. 재벌들이 국가 기간산업에 진출하도록 허용해준 거죠.”

- 재벌은 다시 힘을 얻었다. 그러나 1997년 몰아친 외환위기 사태로 재벌은 다시 궁지에 몰렸다. 김영삼 정부 시절 재벌은 사업 다각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금융기관으로부터 무한 차입을 하며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 1990년 외국인 주식투자 허용으로 해외 자본이 밀려들고, 재벌의 부동산 등에 대한 자산 투자가 급증하자 경제는 표면상 끝없는 활황세를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천정부지로 치솟은 재벌의 부채비율이라는 시한폭탄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침내 1997년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재벌 연쇄부도 사태의 막이 오르면서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모습. 박 후보에게 ‘경제 민주화’ 공약을 제안한 김종인 당시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모습. 박 후보에게 ‘경제 민주화’ 공약을 제안한 김종인 당시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Q. 김영삼 정부에 이어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주범으로 재벌을 지목했습니다. 당시 재벌해체론이 강하게 나왔는데요.
A. “그러나 정부 출범 3개월 후에 정책 기조가 바뀌게 됩니다. 김대중 정부는 2년 안에 외환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정권을 잡았어요. 그런데 2년 안에 외환위기를 극복하려면 내수도 일으키고 수출도 늘려 돈을 벌어야 하잖아요. 그걸 누가 합니까. 재벌들이 해야 하잖아요. 우리나라 경제력의 60~70%가 재벌들의 손에 있는데 그들을 배제하고 외환위기를 탈출할 수는 없는 겁니다. 외환위기 극복 시한을 못박은 게 김대중 정부가 재벌과의 전쟁을 접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재벌은 ‘외환위기 탈출 시나리오’와 ‘빅딜 카드’를 제시하면서 김대중 정부를 달랬다. 재벌은 ‘과도한 중복투자를 자체 조정하겠다’며 ‘외환위기 탈출을 위해 재벌이 앞장서 돌파구를 찾는 게 최선’이라는 청사진을 내밀었다. 김대중 정부는 재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 대표는 “당시 망가진 경제 상황에서 발전적인 경제정책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Q. 벤처기업을 육성하고 정보기술(IT) 산업을 활성화시킨 것은 김대중 정부의 치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A.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짧은 시절의 봄날이었어요. 참 아쉬운 부분입니다. 김대중 정부가 다양한 벤처기업 지원책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코스닥 시장에 자본이 폭발적으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국내 자본시장은 거래소를 중심으로 재벌들이 장악하고 있었죠. 그런데 벤처기업이 등장하면서 재벌이 장악했던 자본이 분산되는 아주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아쉽게도 이걸 이어가지 못했어요. 김대중 정부 후반기에 일어났던 몇 건의 게이트로 정권이 힘을 잃기 시작했고 재벌의 역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벌은 자본력으로 벤처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헐값에 사버리거나 인력을 흡수했죠. 그대로 놔두면 재벌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으니까요. 재벌의 중요도가 낮아지면 경제정책을 자기들 마음대로 끌고 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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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섭 대표는 이후 들어선 노무현 정부도 김대중 정부와 똑같은 길을 걸었다고 설명했다. 초기에는 재벌에 대한 규제책을 얘기하다가 재벌에게 주도권을 넘겼다는 것이다.


Q.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한국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추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A. “노무현 정부 때 눈에 띄는 경제정책이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1년 만에 ‘경제권력이 시장에 돌아갔다’고 말했어요.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다’는 식으로 표현했죠. 노무현 정부 내에 준비된 경제 전문가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책상 위에 놓인 정책백서는 정권인수위원회가 만든 것이 아니라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만든 정책집이었습니다. 게다가 포퓰리즘적인 정책을 내놓다 보니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정책입니다. 노무현 정부는 2000년대 초·중반 서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를 타깃으로 한 강력한 부동산 규제정책을 도입했어요. 그런데 공기업 지방 이전과 혁신도시 개발 정책을 추진하면서 전국의 부동산 시장이 요동을 쳤습니다. 그 결과 2004년 말부터 폭발적인 부동산 가격 상승이 있었습니다.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곳은 재벌이죠. 대한민국에서 땅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재벌 계열의 건설업체들이 호황을 맞았습니다. 재벌들은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수천억 원씩 챙겼어요.”

- 이명박 정부는 아예 ‘기업 프렌들리’ 정책을 들고 나왔다. 한마디로 ‘대기업 입맞춤’ 정책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이는 재벌의 힘을 더 강화시켰다. 역대 정부와 재벌의 관계는 똑같은 패턴으로 흘러갔다는 것이 정선섭 대표의 설명이다.




정선섭 대표는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남긴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정선섭 대표는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남긴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Q. 이명박 후보는 ‘경제를 아는 대통령’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A. “공교롭게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던 해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잖아요. 재벌이 ‘우리 기업 다 죽게 생겼다’고 겁을 막 주는 겁니다. ‘지원 안해주면 망한다’는 식이었죠. 그러니까 이명박 정부는 고(高)환율 정책을 취해주고 대기업 규제들을 풀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뚜렷한 산업정책을 만들 수 없었던 겁니다. 4대강 개발 같은 국책 사회간접자본(SOC) 사업만 있었죠. 4대강 사업도 과실은 재벌들이 따먹었죠. 이명박 정부 3년차였던 2010년에는 그나마 정신을 차렸습니다. 사회 양극화가 심해진 걸 느낀 겁니다. 노무현 정부도 양극화 문제를 얘기했지만 해결을 못했어요. 이명박 정부 초기에는 양극화보다는 당장 글로벌 금융위기를 넘기 위한 대처가 시급했습니다. 그러다 중산층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변화까지 일어난 겁니다. 투표를 하면 국민들이 야당을 찍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2010년 들고 나온 게 동반성장입니다. 동반성장은 경제민주화로도 이어졌습니다.”

-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대기업에 쏠린 부의 편중 현상을 법으로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경제민주화는 지난 대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선섭 대표는 한국은 진보와 보수가 49대 49로 양분되어 있다고 말했다. 나머지 2%가 투표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그 2%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 대표의 분석이다.


Q.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를 꺼내 들었죠. ‘콘크리트 지지층’을 기반으로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괜찮은 방법이었습니다.
A. “맞아요. 캐스팅 보트를 쥔 2%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경제민주화를 이뤄줄 걸로 알고 찍어준 거죠. 그래서 51대 49로 박근혜 후보가 이긴 거라고 봐요.”

- 재벌은 박근혜 정부 들어 완전히 날개를 달았다.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재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재벌 순환출자’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재벌의 손을 들어준 것이 계기였다는 게 정 대표의 분석이다.


Q. ‘최순실 게이트’로 박 대통령과 재벌의 거래 의혹이 제기됐는데요. 정권과 재벌의 집단적 유착이 왜 지금 정부에서 또 다시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A. “박근혜 정부가 친 재벌 정책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를 반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초기부터 규제완화를 외쳤습니다. 규제완화는 국민들의 불편을 해소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벌이 소유한 땅에 묶인 그린벨트를 풀어주기 시작했고 법인세 인상은 절대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출자총액 및 순환출자 제한 규제는 신규 대기업집단을 대상으로만 실시했고요. 한편으로는 재벌들의 경영권 승계 문제를 도와주는 듯한 모습도 보였습니다.”

- 정선섭 대표는 이제 재벌들도 달라져야 할 때가 왔다고 봤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 권력에 의한 통제가 아니라 국민들에 의해 통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정보가 공개되는 시대입니다. 감시 기능이 많아졌어요. 친 재벌 정책이 나올 때 국민 저항이 많을 겁니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사태는 어쩌면 대한민국에 약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는 이런 정경유착이 생기지 않게 할 약이죠.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남긴 교훈을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 하나의 게이트로만 치부하면 우리에겐 미래가 없을 겁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하제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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