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세월호와 남영호…44년 시차 속 도플갱어?





1970년 12월15일 새벽1시27분, 남해 여수 인근 소리도 앞바다. 초속 3.7m 서남풍을 탄 파도가 제주도를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862톤짜리 여객선 남영(南榮)호를 덮쳤다. 인명피해 326명, 당시까지 사상 최악의 연안 해난사고로 기록된 남영호 침몰 사고 순간이다. 남영호는 개발연대 연안 여객선 치고는 꽤 좋은 배였다. 건조한지 2년 된 새 선박이었던데다 덩치도 그 시대에서는 상대적으로 컸다.


남영호의 비극은 총체적 인재(人災)였다. 해운 당국의 수송 수요 조절 실패와 선주 측의 고질적인 안전 불감증, 해양경찰의 근무 태만까지 겹쳐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선주가 사람과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다. 정원 302명에 탑승인원은 338명. 그나마 62명은 승선 명부에도 없었다. 화물 적재량 초과는 더 심했다. 정량인 130t보다 네 배 이상인 543t을 실었다. 남영호가 서귀포항을 출항한 시각이 14일 오후 5시께. 승객 210명에 연말 성수기용 감귤을 가득 적재한 상태였다.

과도한 선적으로 서귀포항을 출발할 때부터 배는 이미 좌현으로 10도 기울었으나 선주는 더 욕심을 냈다. 세 시간 뒤 성산항에 들러 승객 121명을 더 태웠다. 문제는 감귤. 화물창고 2개가 채워지자 선주는 선적이 금지된 화물창고 지붕에 감귤 400상자를 쌓았다. 중간 갑판도 감귤 상자 500개로 가득 찼다. 만재홀수선이 해면에 잠겨 복원력을 잃은 상태로 성산항을 출항한 남영호는 사고 지점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바로 위기에 빠졌다. 먼저 강한 바람이 불며 갑판 위 감귤 상자가 갑판 왼쪽으로 기울며 허물어졌다. 선체가 중심을 잃고 기울어지자 선장은 속도를 줄이고 항진했으나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한심한 것은 해난 사고에 신속 대응해야 할 당국의 태만과 최악의 구조 시스템. 남영호는 침몰 직전까지 긴급 구조신호(S.O.S)를 발신했으나 한국의 재난 기관 어떤 곳에서도 수신하지 못했다. 일본 기타규슈 지역에서도 수신한 국제비상주파수의 구난신호를 이 가능하였다. 훗날 어업무선국에서 조난 신호를 수신했으나 무시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승객 대부분은 남영호 침몰과 동시에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감귤 상자에 겨우 의존해 한 겨울의 바다를 견디던 생존자가 처음 구조된 시각은 새벽 5시20분. 부산 희영수산 소속의 80t급 어선 제9희영호가 여성 승객 1명을 구조해냈다.

그러나 제9희영호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그저 눈앞의 생존자만 건지고 더 이상의 구조작업은커녕 사고 해역을 떠났다. 더욱이 제9희영호는 이 사실을 해양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선장이 구속됐으나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더 이상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표류하는 생존자들을 필사적으로 구한 쪽은 일본 어선 두 척이었다. 오전 8시45분께 일본 어선들은 생존자 8명을 구하고 곧바로 해상보안청에 구조 요청을 보냈다.


일본은 이를 한국 해양경찰에 통고하는 한편 언론에 알렸다. 부산항 부두에서 남영호를 기다리던 가족들의 빗발치는 확인 요구에도 ‘보고받은 바 없다’던 해경은 일본 교도통신에 조난 사실이 기사화한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다. 해경의 구조선이 도착한 시각이 오후 1시께. 일본 순시선보다 4시간이나 느렸다. 뒤늦게 사고 해역에 도착한 해경은 생존자 3명을 찾아냈다. 겨울의 바다에서 기적적으로 12시간을 버틴 생존자를 비롯해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12명에 그쳤다. 다음날 정오 무렵, 정부는 생존 가능성이 없다며 구조작업을 중단하고 89m 해저에 가라앉은 선체 인양도 기술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포기해 버렸다. 유족들은 비정한 바람이 부는 부산 부두에서 까무라쳤다.

관련기사



사고 직후 추가 비리가 드러났다. 폭풍으로 출항이 두 차례 지연되며 승객과 화물을 구겨 넣은 게 처음이 아니었다. 선주는 직원들에게 화물의 두 배 이상을 싣도록 강요했다. 남영호는 화물칸 하나로 인가받은 여객선이었으나 객실 2개를 터서 화물칸을 3개로 만들어 사실상의 반 화물선처럼 많은 짐을 싣고 다녔다. 화물을 더 많이 싣기 위해 선체 바닥에 바닥짐도 한 트럭 분이나 빼냈다. 남영호가 파도를 피해 변침(방향 전환)하는 순간 선체 복원력을 잃고 전복한 것도 바닥짐을 빼버린 탓이다. 사고 10일 전에 선장 경험이 일천한 5급 항해사로 바꾼 사실도 사고 원인의 하나로 지목됐다.

사고를 조사한 부산해난심판원은 ‘화물 선적이 잘못돼 선체가 불안정한데도 이를 고려하지 않고 운항한 선장의 과실과 과적 과승을 방조한 항해사와 사무장의 직무상 과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맞은 얘기일까. 김종길 전 부산지방해운항만청장에 따르면 ‘가당치 않다’. 김 전 청장은 2000년 1월 ‘해양한국’에 ‘해운계의 숨은 이야기-여객선 남영호 침몰 사건’이라는 제하의 기고문에서 ‘전국을 벌집 쑤셔 놓은 듯한 최대의 인명 피해 사건인데도 무지하고 무력한 선장과 선원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봤다.

더욱 꼴불견인 것은 사건이 보도되며 관련 부처가 자기 살 길을 찾아 책임을 회피했다는 점. 교통부와 내무부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한 끝에 두 부처의 하위직 공무원 몇몇이 구속되는 선에서 공무원들에 대한 사건의 책임 소재는 마무리됐다. 군 출신이었던 박경원 내무부 장관과 백선엽 교통부 장관은 사의를 표명했으나 결국 자리를 지켰다. 백 장관만 이듬해 1월 터진 KAL(대한항공) 여객기 납북 기도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떠났을 뿐이다. 제주-부산 항로 예측을 잘못해 과적을 야기한 책임이 있는 중간 책임자들도 전혀 문책 받지 않았다.

자유가 억압받고 맹종을 요구받던 시대, 문책은 대중의 몫이었다. 은방울 자매가 부른 가요 ‘밤 항구 연락선’은 ‘쌍 고동에 허공 실어 침몰된 남영호야’라는 가사가 들어가 국가 위신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찍혔다. 보상 문제는 유족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남영호조난수습대책본부가 책정한 사망자 보상금(1인당 69만원)이 적다는 여론이 빗발치자 남영호 선주의 부친 K모씨는 유족 보상용으로 자신의 제주도 땅을 내놓았다가 몇년 뒤 땅 값이 크게 오르자 소송을 통해 지대 상승분 상당액을 되찾아갔다.(K씨는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이 제주도에 머물 때 친분을 맺었던 인물. 선주로 활동하던 K씨는 이중섭의 그림을 다수 소장했었고, 시인 구상에게 이중섭이 그린 ‘서귀포의 환상’을 줬다가 비싸게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환소송을 걸어 얼마를 받아냈다고 전해진다.)

46년 전 오늘 새벽 발생한 남영호 침몰 사고를 더듬을수록 2년8개월 전 세월호 침몰의 비극이 떠오른다. 구조적 요인과 화물 과적, 여객선의 반 화물선 개조, 가장 먼저 탈출해 살아남은 선장, 국가의 무책임까지…. 마치 44년 시차를 둔 샴 쌍동이를 보는 것 같다. 관건은 앞으로다. 비슷한 유형의 사고가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월이 아무리 잔인해도 기억과 기록의 힘을 이기지 못한다. 세월의 풍화작용은 집단의 기억으로 막을 수 있다. 우리들의 소중한 인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도 낱낱이 찾아내 기록하고 가슴의 기억에 새길 때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