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혁명의 시작부터 몰락까지…‘아시냐(Assignat)’

혁명의 시작부터 몰락까지…‘아시냐(Assignat)’



프랑스 대혁명 초기인 1789년12월19일, ‘아시냐(Assignat)’가 첫 선을 보였다. 아시냐는 혁명 세력이 몰수한 교회의 토지를 담보삼아 발행한 일종의 토지채권. 수익률이 5%인 아시냐는 발행규모가 이례적으로 컸다. 모두 4억 리브르. 액면가격도 비쌌다. 100~1,000리브르까지 고액이었으나 공개 입찰 불과 이틀 만에 물량이 동났다. 투자자들은 국가가 몰수한 교회재산을 값싸게 사들일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국민의회가 토지채권 아시냐를 발행한 이유는 간단하다. 재정 위기. 해가 갈수록 국가 재정이 고갈됐다. 1788년 채무는 약 36억 리브르. 세입 5억 리브르보다 세출(6.3억 리브르)이 훨씬 커 매년 1.3억 리브르가 부채로 쌓였다. 여기에 원리금 상환에 별도로 3.2억 리브르가 들어갔다. 유럽 최강국이던 프랑스의 재정이 이토록 나빠진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연이은 전쟁 패배와 루이 14세 이래 왕실의 사치,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대규모 원조의 후유증이 겹친 탓이다.

국왕 루이 16세는 스위스 은행가 출신 네케르를 재무총감으로 기용해 해법을 찾았으나 성과가 없었다. 농지의 40%를 소유한 성직자와 귀족에 대한 비과세를 철폐해 재정난을 타개하자는 네케르의 혁신책은 파리고등법원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막혔다. 국왕은 결국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했다. 성직자(제1계급)·귀족(제2계급)·시민대표(제3계급)로 구성되는 삼부회 개최는 무려 170년 만에 처음. 제3계급의 대표들이 앞장 서서 세금을 올려 재정을 확충해달라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삼부회의 시민 대표들은 거수기 노릇을 거부하고 세금 증세 방법에서 의결 방식까지 1·2계급과 맞섰다. 나라야 어떻게 되던 세금을 낼 생각이 없었던 성직자와 귀족들은 결국 모든 것을 잃었다. 삼부회의 시민계급 의원들이 따로 국민의회를 만들었다. 민중이 여기에 호응하고 봉기하며 프랑스는 혁명의 여정에 올랐다. 권력을 잡은 국민의회는 부채까지 물려받았으나 사정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혁명의 이상을 전파하는 데도, 외국 군대의 침입에 대비하는 데도 돈이 들어간 반면 수입은 갈수록 줄었기 때문이다.

혁명은 지긋지긋한 세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긴 사람이 많았던데다 징세 청부업자들이 도망쳐 조세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 국가 파산의 위기에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아시냐였다. 국민의회는 아시냐 발행으로 급한 불은 일단 껐다. 그러나 아시냐는 혁명을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혁명을 수렁으로 빠트렸다. 국민의회는 압수한 교회 재산 약 30억 리브르를 담보로 삼은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돈이 필요한 곳이 너무도 많았다.


발행 이듬해에 12억 리브르가 추가 발행되고 성격도 채권에서 법정 불태환 화폐로 바뀌었다. 공급물량 과다 속에 이자마저 없어지고 법정화폐로 성격도 바뀌었다. 액면도 점점 작아져 5리브르짜리를 거쳐 15수짜리 소액권까지 나왔다. 아시냐 지폐가 가장 많이 통용될 무렵 통화량은 약 350억리브르. 담보가치를 훨씬 초과하는 남발은 통화가치 하락과 물가 폭등을 낳았다. 최고가격제와 아시냐 수령 거부시 사형이라는 혁명당국의 극약 처방에도 아시냐 발행 4년 만에 물가는 130배나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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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농민들은 가급적 늦게 팔려고 농작물을 감췄다. 문호 빅토르 위고의 대작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빵을 훔쳤던 시기가 바로 이 때(1795년)다. 아시냐 남발의 후유증으로 물가 폭등과, 농산물 품귀 현상이 극에 달했던 시기. 경제난은 선량한 시민을 도둑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민중의 불만과 증오까지 키웠다. 국왕 루이 16세 부부가 1793년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것도 경제난으로 인해 흉폭해진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혁명정부는 손을 들고 1796년 2월 강제유통을 폐지시켰다. 혁명정부는 아시냐의 화폐가치가 액면가의 0.3%까지 떨어진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렸다.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한 영국과 벨기에, 스위스가 위조지폐를 만들어 프랑스로 반입했기 때문이라며 지폐 제조기도 불태웠다.(스테븐 딜라예의 저서 ‘프랑스 혁명과 화폐’에서는 이 당시 영국 런던에서만 17개의 위조지폐 제작 공장에서 400여명이 프랑스 위조 지폐를 찍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아시냐를 폐지하며 프랑스는 망다(Mandat)라는 이름의 새로운 종이돈으로 혼란을 겪다 1803년 나폴레옹이 프랑화 체제를 도입하고서야 안정적인 통화를 갖게 됐다.

대다수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긴 아시냐로 덕 본 계층도 없지 않다. 은행에서 대출받은 아시냐로 토지를 매입한 자본가들은 통화가치가 하락한 만큼 돈을 벌었다. 제1차세계대전 직후 초물가고를 겪던 독일에서 일부 대기업들이 실물에 대한 선 투기로 악성 부채를 줄이고 기업군을 몸집을 키운 것과 비슷하다. 아시냐는 ‘보이지 않는 효과’도 낳았다. 국가가 몰수한 교회 재산 또는 망명자들의 부동산을 인수한 자본가들은 혁명과 자신의 이익을 동일시했다. 아시냐는 사회의 새로운 중추(자본가) 세력이 구체제(ancien regime)와 완전히 결별하는 촉매제였던 셈이다.

아시냐로 횡재한 곳은 또 있다. 미국. 신생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은 미시시피강 항행권 확보를 위해 뉴올리온스를 프랑스로부터 사들이려고 1,000만 달러를 책정, 협상에 나섰다가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뉴올리온스 뿐 아니라 루이지애나 전체를 1,500만 달러에 사라는 제안이었다. 당시 미국 국토의 2배, 한반도 넓이의 20배인 212만㎢를 1,500만 달러에 사들인 미국은 서부로 서부로 뻗어 나갔다. 아시냐로 상징되는 경제 위기로 돈이 궁한 나폴레옹은 골치 아픈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헐값에 넘겼던 것이다.

아시냐는 일부 자본가와 미국을 더욱 융성하게 만들었지만 프랑스 내에서는 국민 생활과 재정, 혁명의 순수성에도 타격을 가했다. 통화 문란과 경제난이 개혁 피곤증을 확산시키고 종국에는 나폴레옹의 독재 권력을 불렀다. 나폴레옹은 어떤 돈으로 불태환 지폐를 버리고 금속화폐로 되돌아갈 수 있었을까. 약탈 경제와 요즘으로 치면 국유재산 매각을 통해서다. 동서고금을 통해 경제난에는 반동(反動)이 따라붙었다. 프랑스의 아시냐 발행과 퇴장이 그랬다. 아시냐 등장 227년의 시차를 넘어 한국을 본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이때, 경제는 거센 바람 앞의 촛불와 비슷하다. 촛불이 꺼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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