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8> 이메일 한 통으로 영국 최연소 백만장자 '슈퍼잼' 들여온 사연

원한별 자몽인터내셔널 대표



해가 질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논두렁 사이를 뛰어다녔던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면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시어머니를 모시며 넷이나 되는 시동생과 어린 남매를 거둬 먹이느라 농사에다 살림까지 도맡았던 어머니의 고된 노동은 행복한 기억 속 유일하게 슬픈 장면이다. 풍요로운 자연과 따뜻한 가족애를 한껏 누리며 나이를 먹었고 공예디자인을 전공한 후에는 중소기업 웹디자이너로 사회에 첫 발을 딛었다. 동료 두 명과 50만원씩 총 150만원으로 이베이 유통 사업에 뛰어든 게 창업의 시작이었다. 우연치 않게 프레이저 도허티의 슈퍼잼 스토리를 접한 후엔 한국에 슈퍼잼을 들여오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도허티의 답장을 받으며 인연을 맺었고 결국 슈퍼잼의 한국 독점 판매권을 갖게 됐다. 100% 원재료로 만든 건강한 잼 ‘슈퍼잼’을 내세우며 먹거리 사업에 뛰어든 그는 2015년 타임즈가 ‘새로운 10대 슈퍼푸드’로 선정한 ‘타이거너츠’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대자연의 풍요로움 속에서 성장하다




원한별(38·사진) 자몽인터내셔널 대표는 경기도 양주 출신이다.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도로도 잘 뚫려 있어 서울에서 1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산 좋고 물 좋은 시골이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할머니 혼자 7형제를 키우며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원 대표의 아버지는 그 중에 셋째였다. 서울로 유학 떠난 두 형님은 대학까지 잘 나와 서울에서 터를 잡았다. 두 형님을 대신해 모친을 모셨던 원 대표의 아버지는 밭농사를 지어 수확한 야채며 과일을 군 부대에 납품하면서 대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아버지 밑으로 네 명의 삼촌들이 함께 지냈던 만큼 어린 시절 원 대표의 기억 속 집은 항상 북적대고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한편으론 대가족의 살림을 도맡아 하느라 손 마를 새 없는 어머니의 고단한 노동은 가슴 아픈 장면이다.

경기도 양주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대자연의 풍요로움과 가족의 정을 한껏 누리게 해준 시기였다. 앞줄 왼쪽 두번째가 4살 원한별의 모습이다. /사진=원한별 대표경기도 양주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대자연의 풍요로움과 가족의 정을 한껏 누리게 해준 시기였다. 앞줄 왼쪽 두번째가 4살 원한별의 모습이다. /사진=원한별 대표


“해가 질 때까지 친구들과 논두렁을 뛰어다녔던 기억, 겨울이면 꽁꽁 언 논밭 위에서 썰매를 탔던 기억, 집 앞 시냇물에서 미꾸라지를 잡으면서 놀았던 기억 등등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포근하고 행복한 장면이 많이 떠올라요. 주변에 미군 부대가 있어서 미군들이 트럭을 타고 이동할 때면 동네 친구들이랑 트럭을 따라가면서 ‘헬로! 짭짭’이라고 외쳤어요. 차에서 던져주는 초콜릿이나 과자 등을 받아 먹은 기억도 있어요.”

대자연의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의 정을 한껏 누리고 살았던 어린 시절은 원 대표에게 평생 간직하고 싶은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다.

공업 디자인을 통해 소질을 꽃피우다

원 대표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에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서울 수유리로 올라왔다. 당시 군납 사업이 잘 안 되고 있던 만큼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아 나섰던 것. 동네 슈퍼도 운영하고 독서실도 차렸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길게 갈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주택관리사 자격증에 올인했다. 결국 원 대표가 중학생이 됐을 때 자격증을 따내 주택관리소장으로 20여년간 근무했다고 한다.

원 대표는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미술이었다. 공부에 그다지 취미가 없었던 만큼 자연스럽게 디자인학과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처음에는 인테리어학과에 들어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한 달 만에 대학을 그만 두고 재수를 선택하게 됐다. 하지만 입시를 위해 한 달에 200만원 넘게 드는 미술학원에 다닐 수는 없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신에 이어 2살 아래 남동생까지 뒷바라지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운이 좋아서인지 그가 다니던 미술학원 원장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 학생들을 봐주면서 학원 청소를 도와주면 학원비를 면제해 준다는 얘기였다.

“제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요. 미술학원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다녀서 충분히 기본기를 익히지 못해서 학원 다니면서 재수를 하는 게 저한테도 너무 고마운 제안이었거든요. 원장님과는 가족처럼 친해져서 대학 다니면서도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요.”

그는 원하던 대로 서울산업대 공업디자인과 99학번으로 입학했다. 화장품 용기나 가전 제품 외관, 자동차 외관을 디자인하는 분야라 재미는 있었지만 공대생 못지 않게 실습 과정이 험했다고 한다.

원 대표는 “락카칠도 많이 하고 사포도 많이 쓰고 먼지도 하루 종일 뒤집어 쓰고 작업을 했다”며 “공업디자인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공돌이’나 ‘공순이’ 같은 별명이 꼭 따라오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래도 ‘공순이’로 몇 년간 고생을 한 덕분에 지금도 웬만한 제품 디자인은 직접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름의 소득으로 삼는다.

“학점이 좋거나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지만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배운 것은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인 것 같아요. 제품 디자인 하나하나가 고객의 눈길을 사로 잡아야 하니까 고객은 이런 디자인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떻게 느낄지, 과연 이런 디자인이면 선뜻 사고 싶을지 깊이 고민하게 되거든요.”

중소기업에서 만능맨이 되다



대학을 졸업한 2003년 미니어처 제조업체인 아트파밀리아라는 중소기업에 들어갔다. 제품 기획과디자인 업무를 하고 싶어 지원했지만 기획실 소속이라 웹 기획부터 제품 디자인까지 관련 업무를 도맡아했다. 입사하자마자 첫 업무로 그가 맡은 것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홈페이지 디자인 구축이었다. 혼자 고심하던 그는 관련 책자를 구입해 독학으로 터득하며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2년간 근무하다가 도어록 제조회사인 유니패스로 옮겼다. 이전 회사의 경영 상황이 월급마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악화됐던 탓이다. 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트파밀리아는 폐업했다.

“이전 회사에서 웬만한 웹기획 업무를 도맡아 했던 터라 뭘 맡든지 자신이 있었어요. 물론 대기업 같이 큰 조직에 들어가면 전문적으로 일을 하고, 배울 수 있는 동료나 선배도 많겠지요. 하지만 저는 사회 생활을 처음 하는 후배들에게는 중소기업에서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1당 100이 일을 맡아서 하면서 처음에는 힘도 많이 들지만, 결국 그 많은 업무 스킬과 기술들을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거든요. 월급 받으면서 업무 스킬에다 기술까지 배우니 얼마나 좋아요?”

그렇듯 성심 성의껏 직장 생활을 하던 그는 회사 동료가 클레이점토를 재료로 액세서리를 만드는 것을 보고는 흥미를 느끼게 됐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거나 만드는 데 소질이 있었던 그는 클레이점토 주얼리를 취미로 삼았다. 회사 동료 중에 함께 취미로 작업을 하는 팀원들이 생겨났고, 회사 경영 상태가 어려워지자 그는 팀원들에게 클레이점토 주얼리를 아이템으로 창업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다들 쉽게 생각했어요. 예쁘게 만들어 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회사가 역삼동 근처라 퇴근 후에 역삼동 LG타워 앞에 진열대 하나 놓고 제품들을 팔았죠. 그때가 2008년 1월이라 무척이나 추웠던 걸로 기억되네요. 며칠 같이 했던 팀원들이 너무 고생스럽다며 하나 둘씩 그만 뒀지요. 저는 다시 직장 생활을 하기 보다는 주얼리 사업을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어요. 그래서 제품 사진을 예쁘게 찍어 지마켓 등 오픈 마켓에 올렸습니다. 하나 둘씩 팔려나가고, 고객의 상품평도 쌓이니까 월급만큼은 아니지만 수입도 괜찮더라구요.”

스스로 꿈꾼다…자몽인터내셔널을 세우다




그러던 차에 해외 온라인 마켓 진출에 욕심이 났다. 서점에 가서 살펴보니 ‘친절한 이베이 창업 운영 가이드’(권영설 지음)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에는 한국 셀러가 이베이에 제품을 올려 활동하는 것은 거의 없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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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권영설 씨가 온라인 창업교육센터를 오프라인에서 운영한다는 것을 알고는 홍대 인근의 교육장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이베이 창업의 원리부터 운영 방식 등 전반적인 내용을 꼼꼼하게 듣고 실행에 옮겼다. 처음에는 주력 상품인 클레이점토 주얼리로 시작했지만 이후 한국에만 있는 디자인용품이나 해외에서 인기가 높은 로모카메라(특유의 색감으로 마니아층을 확보한 필름 카메라 브랜드) 등을 올렸다. 제품별로 다양하게 소싱하고 각 시장별로 트렌드 조사를 벌이며 체계적으로 사업을 펼쳤다. 창업교육센터에서 홈페이지 관리 등 지원 업무를 하면서 이베이 유통 사업을 병행했다. 사업을 진행하려니 회사명이 필요했다. 동업자들과 그는 ‘스스로 꿈꾼다’는 의미를 담아 자몽인터내셔널이라고 지었다. 그때가 2011년, 본격적인 창업이었다.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세 명이 50만원씩 모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3년간 시장 조사와 제품 소싱을 병행하면서 이베이로 팔다 보니 수출입 프로세스도 완전히 꿰뚫게 됐지요. 그때가 별다른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많진 않지만 적당히 벌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때로 기억에 남습니다. 각 시장의 트렌드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책도 많이 찾아 읽었던 시기였어요.”

어느 날 서점에서 신간을 들춰보던 그의 눈에 책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스무살에 백만장자가 되었다’(위츠 펴냄)라는 책이었다. 부제로 ‘BBC CNN이 주목했다. 단돈 2파운드로 백만장자가 된 청년의 성공창업 이야기’라는 글귀도 눈길을 사로 잡았다. 순간 ‘어떻게 했길래 20살에 백만장자가 됐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주인공인 프레이저 도허티는 할머니의 잼 제조법으로 14세 때 ‘슈퍼잼(SUPERJAM)’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22세에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젊은 사업가로 등극했다. 제조업이라는 안정된 잼 사업에 청년의 패기로 진출한 그는 무설탕, 과일 100% 잼을 개발해 잼 사업을 부흥시키며 지속 가능하고도 안정적인 사업을 꾸렸다. 원 대표는 첫 페이지를 펴든 순간부터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한 순간도 멈출 수 없었다. 뭔가에 홀린 듯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가 2013년 가을이었다.

도허티의 슈퍼잼과 인연을 맺다

한국어 번역 서문에는 우리나라에도 곧 출시할 예정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미 특정 유통업체와 계약을 맺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원 대표는 ‘슈퍼잼’을 자기 손으로 한국에 들여오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갑자기 어린 시절 동무들과 뛰어 놀았던 뒷동산이며 집 앞 시냇가가 생각나더군요. 사시사철 엄마가 밭에서 장만한 재료로 지은 음식들이 선사했던 건강한 기쁨이 주는 감동도 떠올랐구요. 어떤 인위적인 첨가물 없이 자연 그대로의 재료로 만든 식품이 얼마나 우리 몸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 저는 너무나 잘 알거든요.”

2015년 4월 프레이저 도허티와 자몽인터내셔널 직원들이 함께 했던 저녁 시간. /사진=원한별 대표2015년 4월 프레이저 도허티와 자몽인터내셔널 직원들이 함께 했던 저녁 시간. /사진=원한별 대표


그는 슈퍼잼 사이트에 들어가 프레이저 도허티의 이메일 주소를 찾았다. 그리고 이메일을 보냈다. 당신의 책을 읽었고, 당신의 철학에 공감하며, 당신의 슈퍼잼을 들여오고 싶다고! 내용은 간단했지만 그의 진심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의 진심이 통했는지 도허티에게서 답장이 왔다. 아직은 한국에 벤더업체가 없고 연락을 줘서 고맙다는 답변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답장을 받은 원 대표는 이번에는 길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이 가진 철학, 이베이 유통사업 경력 등등 도허티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마지막에는 한국의 독점 판매권을 달라는 요청도 붙였다.

도허티의 답변은 간단했다. 아직까지는 당신을 모르니 서로 신뢰를 쌓으면서 하나하나 진행하자는 제안이었다. 우선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꿴 것이다.

원 대표는 정식으로 들어온 슈퍼잼을 갖고 이듬해 5월 식품박람회에 갖고 나갔다. ‘자몽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했다. “이베이를 통해 첫 수출할 때 지은 이름인데, 당시 지어놓고도 우리끼리 이러다가 과일을 파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정말 과일잼을 팔게 됐던 거죠.”

식품박람회에서는 대기업 바이어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면서 히트를 쳤다. 신세계백화점과 현대백화점이 식품 MD가 같이 해보자고 요청했으나, 그는 ‘슈퍼잼 스토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신세계 바이어와 손을 잡기로 했다. 같은 해 7월 신세계 강남점 식품관의 팝업스토어로 첫 선을 보였다. 고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러던 차에 국내 포럼 행사에 프레이저 도허티가 연사로 초청됐다. 슈퍼잼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도허티와 의논해서 주요 매체 인터뷰를 진행했다. 대성공이었다. 한국 시장의 성장성을 확신한 도허티는 그 해 말 슈퍼잼 독점 판매권을 원 대표에게 줬다.

본격적으로 슈퍼잼 사업을 펼치게 된 원 대표는 한국 소비자의 입맛에 맞게 선물 패키지를 구성했다. 디자인 전공인 만큼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으면서도 건강한 잼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렇게 해서 2015년 슈퍼잼으로만 매출 10억원을 달성했다.

‘10대 슈퍼푸드’ 타이거너츠를 만나다



슈퍼잼 독점 판매권을 갖게 됐지만 원 대표는 단순한 수입이 아니라 좋은 재료를 갖고 건강한 먹거리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재료로는 승산이 없었다. 특별한 뭔가가 필요했다.

지난 2015년 9월 우연히 신문을 읽던 그의 눈에 기사 하나가 들어왔다. 미 타임즈가 타이거너츠를 ‘세계 10대 슈퍼푸드’로 선정했다는 내용이었다. 뭔가 특별한 느낌이 와 닿았던 그는 곧바로 타이거너츠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타이거너츠는 240만년~140만년 전에 동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인류의 조상인 너츠크래커인류의 주식으로 밝혀질 만큼 오래된 식품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사용된 식품으로, BC 3,000년경 조성된 이집트 파라오 무덤에 부장된 항아리에서도 발견됐다. 식이섬유, 칼륨, 비타민E, 불포화지방산, 단백질이 풍부한 채소로 필수미네랄인 마그네슘, 아미노산, 칼슘, 인, 아연 등도 함유한 고영양 식품이다.

원 대표는 “타이거너츠는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세계 음식 재료 1001’로 선정될 정도로 인류의역사와 함께 한 음식”이라며 “구석기 시대부터 아프리카, 스페인 등에서 재배됐고 스페인에서는 특히 전통 음료인 ‘오르차타’를 비롯해 오일, 화장품, 시리얼 등의 재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2016년 9월 스페인 발렌시아 지역의 ‘호세 마리아 보우’사와 타이거너츠 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모습. /사진=원한별 대표2016년 9월 스페인 발렌시아 지역의 ‘호세 마리아 보우’사와 타이거너츠 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모습. /사진=원한별 대표


관건은 고품질 타이거너츠를 생산하는 농가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타이거너츠를 가장 많이 재배하고 가장 많이 먹는 지역인 스페인 발렌시아를 찾아갔다. 발품을 팔면서 다니던 중 발렌시아 지역에서도 3대째 가업으로 타이거너츠를 생산하는 ‘호세 마리아 보우’사와 인연을 맺고 독점 계약을 맺었다.

“많은 농가가 있지만 보우사처럼 대를 이어 전통 방식으로 타이거너츠를 재배하는 곳은 드물더군요. 일례로 밭에 들어가면 지렁이가 한가득일 정도로 유기농 재배법을 고수하고 있어요. 더구나 3대로 내려오면서는 현대화된 시설을 마련, 대량 생산 및 가공을 진행하고 있으니 사업을 함께 할 파트너로 더할 나위가 없는 거죠.”

여러 단계의 품질 테스트와 식품 위생 검사를 거쳐 지난 해 8월부터 타이거너츠를 분말 형태로 들여와 판매했다. 또한 타이거너츠의 효능을 알리기 위해 스페인 디저트 카페 ‘오르차테리아’를 가장 핫한 거리인 가로수길에 선보였다. 르꼬르동블루 런던을 졸업하고 파크하얏트호텔 서울 제과파트에서 경력을 쌓은 김수영 파티쉐를 영입, 제대로 된 스페인 디저트와 전통음료 ‘오르차타’를 일반인에게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매출도 껑충 뛰어 2015년 10억원에서 지난해 15억원을 달성했다. 올해는 20억원 선은 무난히 달성할 전망이다.



직장 생활 5년, 그 후 오픈마켓을 시작으로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선 원 대표, 그에게 창업은 어떤 의미일까.

“돌이켜보면 모르고 달려드니까 무식할 정도로 용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닥치는 대로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구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제 인생에서 중요한 줄기는 ‘책’과 ‘건강’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책을 통해 이베이를 만나고, 도허티와 인연을 맺어 슈퍼잼을 들여왔지요. 타이거너츠도 신문 기사로 접했구요.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자라면서 건강한 먹거리를 접했던 것도 식품사업을 하는 제게 중요한 철학으로 자리를 잡았지요. 만약 창업을 하시는 분이라면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부터 천천히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좋아해야 더 자세히 알고 싶고, 잘 알아야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법이니까요.”

정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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