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괜스레 서랍장을 뒤적이며 해묵은 짐을 정리해본다. 또 다른 시작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새로이 채워질 이름 모를 무언가를 생각하자니 기분 좋은 설렘이 스친다.
짧은 감상을 뒤로하고 서랍장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서류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 작은 나태함에 기대 수많은 세월을 연명했으리라.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오랜 기간 방치된,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 같은 연륜마저 느껴진다. 그제야 자리를 찾지 못해 나뒹구는 정작 필요한 물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우리네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서랍장 속에 채워진 채 차일피일 정리를 미루기만 했던 것들에 대한 어떤 생각.
서랍장 속 그리 깊지 않은 곳에는 서민과 중소기업의 눈물이 채워져 있다. 소비 위축과 투자 감소, 1,300조원을 훌쩍 넘겨버린 가계부채 문제까지 끝이 없다. 청년들은 먹고살기 어려우니 출산은 고사하고 결혼도 필수가 아닌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2%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경제성장률은 이제 꽤 자연스러워 보인다.
조금 더 깊숙한 공간에는 정경유착, 부정부패, 불공정거래, 양극화와 수저계급론 등 수십 년간 우리 사회가 청산하지 못한 잔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고 한 번쯤은 술자리에서 목소리 높여 한탄했을 현실이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과거부터 해오던 관습에 젖어서 혹은 한번 맛본 성공에 도취해 수없이 많은 망부석을 쌓아올려 왔다. 그러는 동안에 사회의 불신은 커져만 갔고 풀뿌리 서민경제는 무너져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낡고 진부한 것들을 한 번쯤은 털어내야 한다. 비우기 위해서는 진정성 있는 반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반성은 스스로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현실과 타협했다’거나 ‘어렴풋이 알지만 적극적으로 행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와 기업으로 넘어가 보자. 단기간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고집해온 것이 아닌가. 부정한 청탁으로 손쉽게 사업을 해오지는 않았는가. 하청기업의 납품단가를 깎아서 돈을 벌어왔거나, 글로벌 기업을 표방하면서 동네 골목대장 노릇에 더 집착해온 것이 아닌지. 건강한 경제 생태계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서민과 중소기업·농민을 위한다면서 실제로 그렇게 입법 활동을 했는지, 협치와 협력을 외쳐온 것이 겉치레에 불과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봤으면 한다. 정치에 많은 이들이 무관심하더라도 어쨌든 정치는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찍어준 표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희망이자 믿음이다.
대한민국의 서랍장 안에는 이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비워야 할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 오랜 시간 쌓인 끝에 넘쳐버린 그것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고, 시간과 비용을 허비하게 했는지 경험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자리에 어쩌면 있었을지 모르는 소중한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다.
2017년 초입에서 우리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생각지 못한 소중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비우고 남겨야 할지에 대한 사회적 토론과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비워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이 절실하게 와 닿는다. 그리고 비워진 서랍장에 새로이 채워질 무언가는 보다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포용적이기를 바란다.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