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검은 왕비 카트린 메디치





왕비가 된 재벌가의 소녀. 프랑스 요리와 발레, 궁정문화와 귀족 사회 에티켓의 전파자, 정략 결혼의 화신이며 잔인한 학살자. 한 여인의 삶에 묻어 있는 흔적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주인공은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린다. 권력을 유지하려 온갖 음모와 술수를 부렸다는 일반적인 평가 이면에 찬란한 프랑스 문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공로자라는 시각이 공존한다.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양면성. 카트린은 날 때부터 그랬다. 유럽 최고의 부자 가문이며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한 집안인 메디치가 적통의 무남독녀.(이복 오빠가 있었으나 사생아였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나 초반 운은 극히 나빴다. 출생 직후 부모를 모두 잃었다. 부친의 사인은 매독, 모친은 페스트와 매독, 출산 합병증으로 죽었다. 8세 때부터는 피렌체 폭동으로 인근 수녀원에서 숨어살았다.

프랑스 왕자와 결혼한 14세 소녀의 기쁨도 잠시. 사실상 소박을 맞았다. 동갑인 남편은 30대 중반의 연상녀와 살림을 차렸다. 시부모로부터도 냉대를 받았다. 교황청 재산을 지참금으로 내려던 숙부 교황 클레멘트 7세가 결혼 1년 만에 사망한 뒤 후임 교황이 지참금 지급을 거부한 탓이다. 지참금과 이탈리아 진출을 위해 교황의 조카딸을 며느리로 삼았는데 아무 것도 얻지 못한 프랑스 왕실은 카트린을 대놓고 구박했다.

눈총을 받던 카트린은 결혼 10년 뒤부터 운이 폈다. 아이가 생기고 왕비 자리에도 올랐다. 남편(앙리 2세)은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로 왕위 계승권이 없었으나 형이 테니스 경기 도중 급사해 왕위를 꿰찼다. 카트린은 앙리 2세와 사이에 아이를 여덟 명 낳을 만큼 관계가 좋아졌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앙리 2세는 나이 40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귀족 기사와 마상시합에서 눈이 찔려 죽었다.


모후(母侯)로서 섭정을 맡은 카트린은 아이들을 잇따라 왕위에 앉혔다. 메디치 가문의 피에 흐르는 단명의 유전인자 탓인지 카트린의 아들들은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줄줄이 사망했다.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가 죽으며 카트린은 1589년 1월5일 사망(70세)할 때까지 검은 상복으로 지냈다. ‘검은 왕비’라는 별칭도 이 때 생겼다. 섭정으로 그가 매진했던 것은 왕권 강화와 정략 결혼. 큰 딸 엘리자베스를 프랑스의 라이벌이던 스페인 제국의 펠리페 2세에 시집 보냈다. 셋째 아들(후에 샤를 9세로 등극)을 13년 연상인 엘리자베스 영국 공주와 결혼도 추진했었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카트린은 잇따라 청혼을 넣었다. 16살짜리 막내 아들을 40세 나이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장가보내려 애쓴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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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이 모후로서 심혈을 기울였던 정략결혼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게 딸 마르게리트의 혼사. 프랑스의 방계 왕가인 나바르 공국의 앙리 왕자(훗날 앙리 4세)를 사위로 맞아들이면서 카트린은 근위대와 구교도 귀족들을 동원해 결혼 축하연에 참가한 위그노(신교도) 귀족들을 대거 살해했다. 아들인 샤를 9세의 권력을 강화하고 위그노를 견제한다는 이유였다. 카트린이 꾸민 학살(성 바르톨로메오의 학살)은

퍼져나가 프랑스 전국에서 7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카트린이 얼마나 왕권에 집착했는지는 왕위 계승이 유력한 앙리 왕자를 놓치지 않으려 애쓴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딸 마르게리트와 앙리 4세가 끝내 헤어지자 카트린은 죽음을 앞두고도 새로운 결혼을 추진했다. 친딸과 헤어진 사위에게 조카딸 마리 드 메디치를 연결시킨 것. 둘의 혼인을 못 보고 죽었으나 카트린은 앙리 4세에게는 장모이자 처고모였다.

프랑스사 최대의 비극 중 하나로 꼽히는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 탓에 ‘악녀’로 기억되지만 카트린은 프랑스에 이탈리아의 고급문화를 이식한 주인공으로도 꼽힌다. 아수라장 같은 종교 전쟁과 내전 와중에서도 이탈리아식 예절을 프랑스 왕실과 귀족 사회에 심었다. 오늘날 서구 사회 에티켓의 대부분도 여기에 연유한다.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 프랑스 건축사의 걸작이라는 튈트리 궁전(화재로 소실)도 지었다. 카트린이 신증축한 슈농소성(城)도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요리와 발레도 카트린과 마리가 피렌체에서 데려온 개인 요리사와 궁정예술가에 의해 퍼진 것이다.

카트린이 병적으로 매달렸던 프랑스의 왕권도, 메디치 가문의 부귀영화도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문화는 남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이 꽃피운 이탈리아 피렌체의 고급 문화가 프랑스로 이식되고 뿌리 내렸다. 돈과 권력보다 예술과 문화의 힘이 더 강하고 오래 간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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