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지주회사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지주회사로 전환되면 복잡하게 얽힌 순환출자를 해소할 수 있고 경영 투명성도 높일 수 있지만 국회가 딴지를 걸고 있어서다. 대기업들에 “순환출자 고리를 끊으라”고 압박했던 국회가 오히려 지주회사 전환을 가로막는 법안들을 대거 양산하고 있다. 기업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10대 그룹의 한 고위관계자는 “삼성·현대자동차·롯데·현대중공업 등이 올해 지주회사 전환, 중간금융지주회사 도입 등을 검토하고 있다”며 “하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여당마저 ‘좌클릭’ 경제정책으로 선회하고 있어 지주회사 전환에 험로가 예상된다”고 토로했다.
◇지주회사 전환에 제동 거는 국회=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로 조기 대선이 예상되는 가운데 국회가 대기업 옥죄기 법안을 양산하고 있다. 상호·순환출자를 해소해 경영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기업을 압박해놓고서는 오히려 지주회사 전환 요건을 까다롭게 하는 법안을 내놓고 있다. 기업이 지주회사로 전환하기 위해 인적분할을 할 경우 자사주를 소각하게 하거나 의결권이 부활되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등 야 3당이 이 같은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고 여기에 새누리당에서 탈당한 개혁보수신당(가칭)마저 동조하는 분위기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선 국면이 다가오면 정당들이 정책 선명성을 부각하기 위해 이 같은 움직임을 본격화할 것”이라며 “신성장동력을 마련하고 투자를 늘려야 할 기업들이 지배구조 문제에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는 양상이 전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행 상법에 따르면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회사가 두 개로 분할할 때는 의결권이 살아난다. 기업 오너나 총수들이 회사 분할 때 의결권이 살아난 자사주를 활용해 지배구조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만큼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삼성전자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분할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상반기 안에 지주회사 로드맵을 내놓기로 했다. 중간금융지주회사 도입도 강구하고 있다. 삼성생명을 정점으로 화재·증권·카드·자산운용 등 금융계열사를 한곳으로 묶기 위해 지분 교통정리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국회에서 지주회사 저지 법안이 통과되면 이 같은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고민 깊어지는 기업들=롯데그룹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신동빈 회장이 지난해 대국민사과에서 지주회사 전환을 통한 투명한 지배구조 확립 의지를 밝혔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당장 지주회사 격인 호텔롯데 상장 시점이 불투명하다. 롯데그룹은 호텔롯데를 상장해 일본롯데홀딩스와의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한 뒤 순환출자를 끊어 지주사 전환을 완성한다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롯데의 지주사 전환 비용은 약 4조~5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며 “신 회장이 호텔롯데의 주요 주주인 일본투자회사 LSI 지분 취득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다만 재계의 골칫거리로 떠오른 국회의 상법개정안 문제에서는 다소 비켜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다. 롯데의 경우 주요 계열사에 대한 특수관계인 지분 비중이 높아 자사주 의결권이 없어도 지배구조를 굳건히 하는 데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그룹도 복잡하게 얽힌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지주사 설립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는 상태다. 현대차그룹은 모비스→현대차→기아차→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를 갖고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분 6.96%를 보유하고 있는 모비스가 지주회사 격이다. 모비스를 인적분할하면 기아차가 모비스의 투자회사와 사업회사 지분을 동시에 갖게 되고 이 중 투자회사의 지분을 확보하면 그룹을 지배할 수 있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기아차가 보유한 모비스 투자회사 지분을 취득할 경우 경영권 승계도 마무리된다.
현대중공업은 회사분할을 통한 지주사 전환을 공식화한 상태다. 국회에 계류된 법안들이 최종 공포되기까지의 물리적 시간을 고려하면 지주사 전환은 각종 제약을 비켜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조선해양(현대중공업)과 전기전자(현대일렉트릭), 건설장비(현대건설기계), 로봇(현대로보틱스), 서비스, 그린에너지 등 6개 회사로 분할을 추진하고 있다. 다음달 27일 주주총회를 거쳐 4월1일 분할, 5월10일 재상장을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국회가 지주회사 저지 법안을 의결하고 특정 기간을 정해 소급하는 방안을 내놓을 경우 지주사 전환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서정명·서일범·한재영기자 vicsj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