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의 사업재편 작업이 올스톱됐다.
주요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의 통상마찰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미래 성장동력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사업개편을 통해 경쟁력을 높여야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반(反)기업 입법이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대선주자들까지 이 같은 분위기에 편승하고 있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고, 정책의 주도권을 누가 쥘지 모르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이 가득한 상황에서 그룹의 미래를 결정할 큰 골격의 사업재편을 추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5대 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11일 “경영 효율화를 위한 지주회사 전환, 해외기업 인수합병(M&A), 조직재편을 통한 경쟁력 제고 등의 작업이 전면 중단된 상태”라며 “미국·중국·일본은 경제활성화를 위해 기업 살리기에 나서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역주행하고 있어 한숨만 나온다”고 말했다.
◇동시다발 악재 파고에 사업개편 전면 중단=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0대 재벌 개혁론’을 내세우며 대기업을 강도 높게 압박할 것임을 예고했다. 문 전 대표는 △금산분리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자회사 지분 의무소유비율 상향조정 등 대기업그룹의 뼈대를 흩뜨릴 수 있는 재벌개혁 공약을 내놓았다.
금산분리가 현실화되면 금융계열사를 가지고 있는 삼성·한화그룹이 직격탄을 맞게 된다. 삼성의 경우 삼성물산이 삼성생명 지분 19.5%를 보유하고 있고 생명은 전자 지분 7.2%를 갖고 있다. 금산분리 정책이 시행되면 생명은 전자 지분을 일정 수준 아래로 낮춰야 하고 이 경우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 등 오너 일가의 지배력은 약화된다. 물산이 시장에 나오는 전자 지분을 사들일 수도 있지만 수조원의 현금이 필요하다.
금융계열사의 타 계열사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는 방안도 재계를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하게 된다. 생명 등 금융계열사는 전자와 같은 제조업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어 경영권 방어에 구멍이 뚫린다. 한화생명·한화증권 등을 거느리고 있는 한화그룹도 마찬가지다.
출총제가 부활하면 순환출자를 통해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롯데그룹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지주회사 전환 사실상 불가능=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에 더해 새누리당에서 탈당한 바른정당까지 상법개정안·공정거래법개정안에 힘을 실어주고 있어 대기업들은 그야말로 움쭉달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들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대기업들의 지주회사 전환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계열사 교통정리를 통해 경영 효율성을 높이고 지배구조를 단순화하려는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지주회사 전환과 관련해 국회에는 2개 이상의 법안이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기업이 인적분할을 할 때 자사주 분할신주를 배정하면 의결권을 제한하는 공정거래법개정안이 지난달 말 발의됐고 지주사 전환시 자사주 분할신주 배정을 아예 금지하는 상법개정안도 버티고 있다. 더욱 공고해진 여소야대 정국을 이용해 야당은 1월 임시국회에서 법안 처리를 강행하겠다는 태세다.
지주회사 전환작업을 하고 있는 대기업의 고위 임원은 “자사주 의결권을 제한하면 소버린·엘리엇 등과 같은 해외 투기자본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며 “이 같은 법안들은 지주사 전환을 하지 말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국회가 대기업들에 ‘순환출자를 해소하라’며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정작 지주회사 전환을 불가능하게 하는 입법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문 전 대표의 경제공약과 상법개정안에는 기업 경영권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대거 포함돼 있어 기업들의 행동반경을 더욱 옥죄고 있다. △노동자 추천이사제 도입 △집중투표제 △다중대표소송제 △전자투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이 그것이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본부장은 “경쟁 국가들은 기업 살리기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데 우리는 기업 죽이기 법안만 양산하고 있다”며 “대선주자와 국회는 글로벌 경제가 돌아가는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