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투자은행(IB)의 경제 분석이나 전망 보고서를 보면 내용의 깊이와 정확성 못지않게 ‘포장’에도 공을 들인다. 단적으로 촌철살인이거나 다양한 함축성을 띤 적절한 비유의 제목이 달린 보고서는 단숨에 마음을 사로잡곤 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메릴린치는 올해 세계 경제전망 보고서를 내면서 30여쪽의 분석 내용을 ‘체제 전환(regime shift)’ 두 단어로 요약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모은 보고서는 새해 한국 경제에 대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Walking on thin ice)’고 명료하게 짚은 호주 최대 IB인 맥쿼리였다.
최근 한국 경제가 직면한 위기 상황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20년 전 발생했던 외환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지만 어쩐지 우악스럽다. 위기가 똑같은 모습으로 오는 일도 드물지만 외환보유액이 3,700억달러를 넘는데다 연간 900억달러 안팎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경제지표를 너무 경시하는 듯해 한편으로 무책임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반면 맥쿼리의 보고서는 얇은 얼음판 위에서 함부로 움직이기조차 쉽지 않은 한국 경제의 모습을 너무 정확히 표현한 듯해서 오히려 가슴 깊이 꽂힌다.
실제 국내외 경제 환경도 단숨에 와장창 무너지기보다 아슬아슬한 위험 요인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 형국이다. 가계부채는 1,200조원을 넘어섰는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올해 금리 인상 속도를 당초 예상보다 앞당길 수 있다고 밝혔다. 다음주 출범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주요 경제정책이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고 그나마 확실한 보호무역주의 강화는 겨우 회복세를 보이는 수출에 다시 찬물을 끼얹을 우려가 적지 않다. 지난해 6월 국제금융시장을 흔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Brexit)는 언제든 글로벌 금융시장에 여진을 일으킬지 모르는데다 이탈리아 등 남유럽의 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저성장과 불평등이 고착화하는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 속에 한국은 추가로 두 가지 중대 문제를 떠안고 있다. 하나는 최순실 게이트가 촉발한 대통령 탄핵심판이다. 조기 대권 레이스가 펼쳐지며 정치적 리더십과 안정성이 취약할 대로 약해진 상태다. 2017년 세계 정치·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줄 트럼프 변수에 대응해 일본·영국·독일 등 선진국도 앞다퉈 조기 정상회담을 추진하며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하고 있지만 한국은 리더십 공백으로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여기에 북핵과 미사일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도발적 리스크로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일단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의 신년사는 예측을 불허하는 트럼프 시대 탓인지 신중한 모습이다. 이는 그만큼 한반도 안보 상황이 북측의 오판시 치러야 할 대가가 위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북핵이 촉발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중국의 꼼수 보복으로 연예인부터 여행사, 심지어는 화장품업계까지 톡톡히 곤욕을 치르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얼음판을 그나마 떠받치고 있는 것은 기업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차·SK하이닉스·LG화학 등 대기업들은 경기 회복이 지지부진한 해외시장에서도 선전하며 탄탄한 실적을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돈이 있는 기업들도 특검 수사와 표 얻기에만 급급한 정치인들을 보면서 투자와 지출을 꽁꽁 동여매고 있다. 4차산업 혁명의 격변기를 맞고 있지만 기업들은 눈앞의 살얼음판에 잔뜩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처지인 셈이다.
위태로운 살얼음판 경제에서 날이 더 추워지면 오한에, 따뜻해지면 발밑 꺼질 걱정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것은 역시 서민들이다. 과도기로 일을 벌이기 어려운 대통령 권한 대행 체제지만 어려운 시기인 만큼 도드라지는 취약 계층을 파악하고, 여기에 정부의 역량을 집중할 기회는 살얼음판의 미끄러움이라도 이용해 꼭 낚아채야 할 최소한의 목표다. 툭하면 국민을 앞세우는 정치권이 포퓰리즘의 도끼로 남은 얼음판마저 깨뜨리지는 않는지 두 눈 부릅뜨고 경계하는 것이 우선이기는 하다.
손철 뉴욕특파원/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