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에드가 알렌 포



예술과 돈, 군대와 여인, 그리고 미스터리와 암호, IT. 만 40세,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미국 소설가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인생 단면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즐거운 사라’의 작가로 유명한 D.H.로렌스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인간 정신의 천장과 음습한 지하통로를 찾아가는 탐험가’. 극과 극이라는 얘기인데 그럴 만 하다. 가슴 속 깊은 공포를 유발하는 ‘검은 고양이’와 바닷가 모래알처럼 잔잔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읊은 ‘에너벨 리’를 지은 작가가 동일 인물이다. 에드가 앨런 포.

아름다운 운율의 시와 복잡한 구성의 소설로 주목 받은 포의 문학은 복잡 다단한 인생의 반영이다. 1809년 1월19일 보스턴에서 연극 배우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분장실에서 자라다 3세 때 부모를 잃었다. 부유한 담배 사업자 졸 앨런의 양자로 입양된 후에는 미국과 영국을 오가는 등 더 없이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았으나 정신불안에 시달렸다. 어딜 가도 천재로 인정받았지만 온전히 발을 붙이지 못했다.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하고도 1년 밖에 못 다니고 양부모와는 불화를 겪었다. 발작성 도박으로 빚을 지고는 군대에 나이를 속여 병사로 입대할 무렵에는 첫 번째 작품을 썼다. 2년 복무 뒤에는 부친의 강권으로 미국의 육군 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갔다. 여기서도 포는 못 견뎠다. 명령 불복종으로 퇴교 당했다. 가족과 완전히 결별하고 문학잡지사에서 일하던 청년 포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로 인정받고 27세에 14살 어린 조카와 결혼, 가정도 꾸렸다. 이 시절이 인생 황금기. 결혼 11년 만에 사별한 그는 술과 도박에 빠졌다. 나이 40세에 실종된 후 한 술집에서 정신착란 상태로 발견된 뒤 얼마 안 지나 죽었다. 포의 장례식은 객사한지 160년이 지난 2009년에 다시 열려 화제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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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을 스쳐 갔지만 그는 추리소설의 개척자이며 19세기 중반 미국 문학을 세계 수준에 근접시킨 작가로 꼽힌다.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음에도 유럽에 대한 미국의 문화적 열등감을 해소시킨 작가의 한 사람으로도 평가된다. 포와 동일한 시대를 살았던 너대니얼 호손(대표작 ‘주홍 글씨’), 허먼 멜빌(백경)이 등장하며 미국 문학은 비로소 영국과 어깨를 견주는 수준에 올라섰다.

포는 작품 속에 숫자를 형상화하며 확률과 암호를 깔았던 작가로도 기억된다. 대표작의 하나인 ‘황금충’을 재해석한 어린이 수학교재가 나오고 세계 최대의 IT(정보통신) 전시회인 RSA 콘퍼런스는 지난 2009 대회의 상징인물로 포를 내세웠다. 포의 수많은 작품 속에 스며든 확률과 기호화한 암시가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평가에서다.

포의 아류도 있다. 와세다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소설가 지망생 히라이 다로(平井太郞·1894~1965)는 에드가 알렌 포를 흠모한 나머지 1923년 이름을 아예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로 바꿨다. 포와 달리 천수를 누린 에도가와 란포는 작가로 활동하는 동안 장안의 지가를 올리고 일본 추리문학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아류의 아류도 있다. 한국 추리소설의 여명기라는 60년대, 70년대의 어린이들은 대부분 포 또는 란포의 해적판을 읽으며 자랐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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