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여름, 서울대 동양화과에 갓 입학한 이우환은 작은 아버지의 병문안을 위해 일본 밀항을 감행했다. 그는 숙부의 권유로 계획에 없던 일본 정착을 택했고 철학을 전공한 비평가 겸 작가로 ‘모노하(物派)’ 창안 세력의 중심인물이 된다. ‘모노하’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통해 존재성을 성찰하고 사물과 인간의 관계성을 생각하게 하는 일본의 중요한 예술 흐름으로, 이우환과 모노하는 일본 현대미술사의 한 장(章)을 차지한다. 만약 당시 이우환이 한국으로 돌아왔다면, 그의 예술세계와 영향력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막 근대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한 국내와 달리 일본은 근대주의적 사고에서 탈피하고 예술의 형식을 파괴하는 실험적 ‘아방가르드 미술’이 움트던 상황이었다. 패전 후 상실감 속에서 모색하던 새로운 시도, 유럽 중심의 문화에 대항하던 다문화주의 등으로 특히 1950년대 중반부터는 도쿄의 ‘실험공방’, 간사이 지방의 ‘구타이 미술협회’ 등이 목소리를 내던 중이었다.
한국이 낳은 미술가 이우환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일본 아방가르드 미술이 어떤 것인지 그 정수를 보여주는 일본작가 노부코 와타나베(69)의 개인전이 갤러리 아라리오 천안에서 개막했다. 유럽과 일본을 누비며 왕성하게 활동한 여성작가로, ‘구타이’를 주도한 ‘요시하라 지로 최고상’의 1999년 수상자로 일본 화단에 이름을 새겼다.
그의 대표작은 색색의 천을 나무 프레임 위에 펼쳐놓고 그것을 잡아 당길 때 생기는 장력으로 자연스러운 곡선을 이루는 릴리프(relief) 조각 작업이다. 마치 못에 걸린 옷자락이 찢기기 직전의 절체절명 상태 같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원상복구될 수 있다는 안도와 찢기고 구멍 뚫려 되돌릴 수 없는 혼란의 한가운데에 점(點)처럼 보이는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로 인해 널찍한 전시장은 선명하고 강렬한 원색의 울림과 팽팽한 천의 장력이 보여주는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이우환의 설치작품이 돌·철판 등 대수로울 것 없는 재료들로 묵직한 존재감과 관계맺음을 얘기하는 것처럼, 별것 아닌 천 조각이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1948년 도쿄에서 태어난 와타나베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해 미술과 음악을 넘나들며 인간과 물질,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 색과 형태 등 상반되는 존재가 갖는 관계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켜 왔다. 1970년대 아방가르드 예술가로 활동하던 그는 1990년대 후반 유럽에서 후기 식민주의와 연관된 전시가 기획되면서 자연스럽게 제3세계 출신에서 서구 미술계 주류로 입성했고 지금은 독일 뒤셀도르프에 거점을 두고 일본을 오가며 작업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작을 두루 볼 수 있다. 5월7일까지. (041)551-5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