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나홀로 설에] 싱글남 둘의 '어색한' 명절 보내기



설 연휴가 시작된 지난 27일 파고다어학원이 서울 강남지점에 운영하는 ‘명절대피소’로 사람들이 들어서고 있다. /서울경제DB설 연휴가 시작된 지난 27일 파고다어학원이 서울 강남지점에 운영하는 ‘명절대피소’로 사람들이 들어서고 있다. /서울경제DB





“이번 명절에 내려오니?”

“아뇨, 공부할 게 많아서 힘들 것 같아요”





‘통화종료’ 버튼을 누른 후 자연스레 한숨이 튀어나온다. 올 설에는 꼭 내려가고 싶었지만, 도무지 내려가서 버텨낼 자신이 없다. ‘취업은 했느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등등의 친척들의 융단 폭격과 같은 질문을 받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영혼이 가출(?)을 하고야 만다. 그 꼴을 당할 바에 서울에서 혼자 있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드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후배 녀석의 뇌 속에서도 비슷한 루트의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렇게 시작된 후배 녀석과의 설 보내기. 일단 명절 때 문을 여는 곳을 검색한다.

보통 설 당일은 가게 주인장님도 쉬셔야 하기에, 문을 여는 곳이 많지 않지만, 우리가 보기로 한 날은 연휴 첫째 날이므로 그런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폭풍 검색’을 시작한다. 그리고 정해진 당일의 ‘루트’. 그렇게 우리는 함께 설 연휴 첫째 날 만났다.

▲청춘들의 마지막 안식처, ‘명절 대피소’

마냥 놀 수 만은 없다는 생각에 강남역 부근 어학원에 위치한 ‘명절 대피소’에서 영어 공부를 하기로 정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오전 8시, 꽤 이른 시간이었지만 미리 명절 대피소의 정보를 접한 취준생과 공시생들로 스터디룸은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코 소란스럽지 않다. 얼굴에 절박함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탓에 누구 하나 시끄럽게 떠드는 이가 없다. 어학원 명절 대피소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렇게 3시간이 흐른 후, 점점 오랜 수험 생활로 팽창할 대로 팽창된 위장에서 “배고프다”며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평소 같았으면 ‘혼밥’을 눈치 보지 않고 실행할 수 있는 ‘김밥0국’이나 ‘김0네’로 향했겠지만, ‘명절을 명절이라 부를 수 없는’ 취준생의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싶었던 탓에 옆 어학원 ‘명절 대피소’로 배식을 받으러 출발한다. 옆 어학원에서 명절 대피소 이용객을 위한 ‘명절 비상식량’을 나눠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비상식량’이지 내용물은 여느 식사보다 알차다. 전투식량과 음료, 스낵 등이 포함된 패키지에 마음에서 포만감이 물씬. (므흣) 생각보다 풍부했던 비상식량 탓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명절에 공부라니. 왠지 모를 허전함에 자괴감이 밀려올 수 있다. 그럴 때에는 잠시 토익 책을 엎어두고 마음의 양식을 쌓아보자. 명절대피소 한 쪽 벽면 가득히 문학, 교양서적이 마련돼 있다. 취업준비, 토익공부를 핑계로 책을 손에 잡아본 지 오래되지 않았는가? 이참에 잠시라도 책을 읽어보자. 명절에 집에서 뒹굴거리다 잔소리 폭격을 받는 것 보다는 마음을 움직일 문학 속 구절을 찾아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추천 도서는 하상욱 시인의 ‘시 읽는 밤’. 이름하야 ‘시밤’. “근데 아까 분명히 여기에 꼽혀있는 걸 봤는데. 어디 갔지 ‘시밤’?”

이제 배도 좀 불렀으니 다음 장소로 이동해볼까?

▲ 연휴에는 역시 ‘꿈과 희망의 월드’지

가족적인 분위기가 필요한 타이밍을 가까스로 눈치채고 미취학 아동들의 성지이자 커플들의 성지인 ‘00랜드’로 발길을 돌렸다.

오후 12시 30분. 명절이라는 것을 지우고 생각하면 오히려 평소 주말보다 사람이 적은 편이라는 느낌이 든다. 깔끔하게 ‘티켓팅’을 마치고 꿈의 세상 그곳으로 입장한다. 커플들만 착용한다는 동물 머리띠를 하고.



풋풋했던 대학 새내기 이후 타본 적도 없는 놀이기구를 세상 열심히 소리를 질러가며 타고나니 시간이 2시간가량 훌쩍 지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날 기념 퍼레이드. 브라질 삼바 풍의 퍼레이드를 상상했다면 과감히 접어두시고, 명절을 맞아 웅장한 북 연주와 전통 타악기들의 아름다운 선율이 어우러지는 민속 한마당이 퍼레이드 동선에서 펼쳐졌다. 흥겨운 우리 가락에 맞춰 귀를 기울였더니 슬슬 신호를 보내는 야속한 내 위장. “배고파요”

△정유년을 맞아 1월 한 달간 이름에 ‘정’이나 ‘유’가 들어간 사람은 자유이용권 50% 할인! ‘정’과 ‘유’가 모두 포함된 사람은 추가 할인된 2만4,000원에 자유이용권을 구입할 수 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머나먼 유럽에서 말을 즐겨 타신 분이 딱 해당된다. 설이 가기 전 하루 빨리 자진귀국해서 할인혜택을 누려보시길. 물론 귀국하면 꿈과 희망의 나라 롯데월드 대신 구속과 기소의 나라 특검월드로 갈 가능성이 높지만.

함께 외쳐볼까요? “거친~태클과 강한~저항을 헤치고~ 헤치고~ 헤치고헤치고헤치고!” “렛츠 조사!”



지난 27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의 전경./이종호기자지난 27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의 전경./이종호기자



▲ 겨울의 향취를 느끼려면 호수로, 호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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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위장을 위로하기 위해 이태원으로 이동하던 중 멀리서 보이는 호수의 매력에 이끌려 그곳으로 내려갔다. 추운 날씨 탓에 이날 호수를 찾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나온 몇몇 커플들과 운동을 위해 나온 노인분들을 제외하니 남의 시선을 느끼지 않고 산책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어색함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애인과 함께 왔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 싫어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나 : “아… 날씨 진짜 좋다 그렇지?”

후배 : “네, 선배. 그렇네요 아하하…;;;”



이후 이어진 어색한 침묵 속에 잠시 보고만 가기로 했던 호수를 한 바퀴 반이나 돌아버렸다. 배고프다며 아우성을 쳤던 위장은 이제 태세를 바꿔 ‘폭동’ 직전의 시위대의 모습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싱글들이 명절을 보내기에 한강공원도 안성맞춤이다. 여름에 한강공원을 찾는다면 고민 없이 치맥과 함께하겠지만 쌀쌀한 바람이 부는 겨울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추운 몸을 따뜻하게 하는, 한강이 아닌 곳에선 접하기 어려운! 그건 바로 끓인 라면! 단돈 3,000원으로 컵라면과는 비교할 수 없는 라면 본연의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 국물까지 원샷하고 아재처럼 “시원하다~”를 외쳐주면 포켓몬을 잡으러 뛰어다닐 힘이 생겨난다. 한강공원에는 희귀템이 자주 출몰한다는 소문이...! 희귀템도 잡고 레벨로 올려 잘나가는 사촌들을 이겨보자!

엄마: “이번에 누구는 공기업 취직됐다더라. 너는 도대체 하나라도 잘난 게 뭐냐?”

나:“헤헷 나는 걔보다 도감에 포켓몬도 더 많고 레벨도 더 높다구욧!”

▲ 좋아하는 맥주에 새로운 ‘인연’까지

배고픈 위장은 평소 ‘혼술’로 친해진 ‘베프(베스트 프렌드)’ 맥주로 대신하기로 마음먹고 이태원의 ‘더부스’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실내. 사전에 신청한 참가자 15명이 크래프트 비어 한 잔과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그 참가자 중 두 명이 우리다.

무료로 제공되는 맥주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청춘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참 오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마음 저 깊숙한 곳부터 우러나온다. 특히, 그곳에서 만난 청춘들은 “명절에 내려가지 못했다고, 잔소리를 피해 이곳으로 왔다고 왜 자신들이 쓸쓸하고 우울한 사람으로 비치는지 알 수 없다”며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자유롭게 명절이라는 ‘홀리데이’를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흥겨워 마지않아 했다.

이곳에서 만난 이현서(29)씨는 “부모님께서 걱정되는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알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계속 비슷한 말을 듣다 보면 오히려 반감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며 “비슷한 고민을 한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 가족들과 있을 때보다 ‘마음의 위안’을 얻고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옆에 앉아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김영준(34)씨도 거들고 나섰다. 그는 “결혼, 취직, 입시 같은 것들이 ‘우리가 잘 살고 있다’는 지표로 생각하는 집안 어른들이 너무 싫다”고 말하며 연신 음료를 들이켰다.

맥주 한 잔과 흥겨운 분위기 때문인지 매일 보던 사이였지만 서먹했던 후배에게 형제애(?)까지 느끼며 가까워질 수 있었다.

△더부스가 있는 이태원은 설 명절과 상관없이 붐빈다. 시끌벅적한 이태원 뒷골목을 걷는 것만으로도 자칫 우울해질 수 있는 명절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 간판도 없는 조그만 술집에서 처음 만난 타국 사람들과 어울려보는 건 어떨까? 명절에도 토익 공부할 당신의 열정이라면 대화 정도는 가능할 게다. 영어를 하려면 식은땀이 난다고? 걱정 말고 얼굴에 철판을 깔자. 언어는 자신감이다. 정 안되면 이거라도 물어보자. “두유 노 싸이?”, “두유 라이크 김치?”, “두유 노 김연아?”



▲ 마냥 노는 명절? 아니 난 마음의 양식까지 채울건데?

“위장의 힐링을 마쳤다. 그렇다면 마무리는 마음의 양식을 채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헛된 망상으로 찾은 마포구 염리동의 ‘퇴근길 책 한 잔’.

‘잔소리, 눈칫밥, 커플 free’라는 ‘절대 규칙’ 아래 모인 2030 직장인들은 저마다 회사 뒷담화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책방에 앉아 있어 보이는 책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명절 잔소리 대책회의, 명절 음식 나누어 먹기, 세뱃돈으로 고스톱 치기 등 각종 이벤트를 즐기는 평소 ‘퇴근길 책 한 잔’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책을 좋아하던 후배와 나는 얼른 자리를 잡고 책을 읽어댔다. 그리고 미리 사온 맥주를 조금씩 들이키며 ‘아 이런 것이 힐링이구나’하며 새삼 감탄해 마지 않아 했다.

그리고 책에만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어색한 분위기도 생각나지 않게 됐다. 마음의 양식과 정신적인 ‘힐링’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짧지만 알찬 시간이었다.

‘명절 대피소’라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 유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을 집안으로부터 유리시킨 어른 세대에게 있다. 어른 세대가 미리 설정해 놓은 잣대로 그들의 ‘안위’를 판단하고 그에 부합하지 못하면 ‘실패자’, ‘패배자’로 낙인찍어 ‘잔소리 융단 폭격’을 가한다.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집단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그 집단으로부터 유리시킬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본능이므로.

명절 대피소는 가족들로부터 버려진 2030세대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며 그들이 숨 쉴 수 있는 그들만의 아지트다.

/이종호기자 유창욱 인턴기자 최재서 인턴기자phillies@sedaily.com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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