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1년 국민연금제도를 도입한 일본은 초기만 해도 연금복지사업단을 만들어 복지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연금 가입자에게 주택매입자금과 학자금을 빌려주거나 전국 각지에 휴양시설인 그린피아를 짓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13곳의 그린피아가 경영난에 빠져 원금의 5%도 회수하지 못했고 일부는 중국 업체에 매각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당시 손실액만 따져도 3,800억엔에 달해 국민의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실패를 교훈 삼아 2001년 3월 사업단을 폐지하고 후생성이 지도·감독하는 체제로 개편했다. 바로 오늘날의 일본 공적연금인 연금적립금관리운용독립행정법인(GPIF)이다. GPIF는 운용자산만 130조엔(약 1,325조원)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연기금이다. 8명의 금융 및 경제 전문가로 구성된 투자위원회에서 중장기 투자방향을 결정하는데 실제 자금 운용은 민간 신탁은행 등에 전적으로 위탁하고 있다.
GPIF는 아베 신조 정권 출범 이후 주식편입 비중을 높이는 등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 아베노믹스의 첨병 역할을 떠맡고 있다. 2014년 10월 국내외 주식투자 비율을 50%까지 끌어올리는 대신 채권은 60%에서 35%까지 낮추기로 결정한 것이 단적인 예다. GPIF의 포트폴리오를 재편해야 한다는 아베의 발언을 의식한 사실상의 주가부양책인 셈이다. GPIF는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손실에 허덕였지만 지난해 4·4분기에는 미국 증시 덕택에 분기 최고치인 10조엔을 웃도는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아베 총리가 트럼프 정부의 공세에 맞서 GPIF를 동원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워싱턴DC에서 열리는 미일 정상회담에서 GPIF가 미국 인프라 사업에 투자해 70만명의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방안을 선물로 내놓겠다는 것이다. 비록 논란이 없지 않지만 GPIF는 발 빠른 대응에 나서는 데 반해 우리 국민연금은 동네북으로 전락해 움쭉달싹 못하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정상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