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해양의 유동성 위기설이 증폭되고 있지만 구조조정 칼잡이 역할을 해야 할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역할을 포기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한때 국책은행은 구조조정 기업에 ‘엄한 산타클로스’로 불릴 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지만 지금은 책임소재를 따지느라 몸을 사리고 비판여론에 좌고우면하면서 오히려 위기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산은은 오는 4월 말로 만기도래하는 대우조선의 회사채 4,400억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놓고 뚜렷한 묘책을 내지 못한 채 시간만 끌고 있다. 유동성 위기가 해결될 수 있다는 명확한 시그널을 시장에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위기설만 확산되는 상황이다.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단독으로 만난 이동걸 산은 회장은 “대우조선 정상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시장의 불안을 잠재우는 데는 역부족이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실제 산은은 혈세 투입 불가 원칙을 고수한 채 4월 만기도래 채권에 채무재조정과 시중은행의 대우조선 여신한도(익스포저) 복원 카드를 들고 나왔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산은은 시중은행 익스포저를 복원해 대우조선에 일종의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주겠다는 복안이지만 시중은행이 이에 동참할지는 회의적이다. 산은은 여론과 정치권의 비판을 의식해 추가로 자금(혈세)을 투입하는 것에 선을 그으면서 시중은행의 추가 대출지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시중은행이 흔쾌히 위험부담을 떠안으려 하지 않고 있어서다. 공모채 채무재조정 역시 산은으로서는 극단의 카드였지만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분위기다.
시장에서는 산은이 대우조선의 유동성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채권단이 지원하기로 한 자금 중 아직 사용하지 않은 7,000억원을 집행하는 등 논란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하는데 ‘국민혈세’를 투입한다는 여론과 정치권의 비판만 의식해 미루다 보니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공법으로 돌파해야 하는데 이곳저곳 눈치만 보고 변죽만 울리다 보니 시장은 시장대로 불신을 갖고 해외 선주들도 대우조선에 선박 발주를 맡기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국책은행인 수출입은행 역시 지난해 조직개편에서 관련 부서를 신설하는 등 구조조정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지만 벌써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구조조정의 선장 역할을 해야 할 행장이 3월 초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어 대행체제가 불가피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특검에 불려다니는 금융위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을 앞둔 상황을 고려하면 수은의 리더십은 장기간 공백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수은은 현재 성동조선 주채권은행에다 대우조선의 최대여신 제공 은행이라 구조조정 컨트롤타워가 장기간 비어 있으면 대우조선은 물론 성동조선과 다른 중소 조선사의 구조조정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우려되고 있다. 지난해 9월 기준 수은의 대우조선 익스포저가 9조6,000억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구조조정이 잘못되면 수은의 실적 악화도 예상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대우조선 구조조정을 둘러싼 산은의 행보는 구조조정 동력을 잃은 국책은행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며 “특히 당국이 구조조정에 대한 책임을 국책은행에 전부 떠넘기려는 분위기가 있고 여론과 정치권의 비판에 시달리다 보니 국책은행도 과거 LG카드 구조조정 작업 때처럼 소신을 갖고 정책을 펴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올해부터 구조조정이 건설·정유화학 분야로 전방위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주포’ 역할을 해줘야 할 국책은행이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전체적인 산업 구조조정 작업이 벽에 부딪혀 골든타임마저 놓칠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