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부처 A 차관은 경제정책 최고 실무자로 꼽힌다. 과장 시절에는 기자들과 잘 어울리며 만물박사로 유명세를 탔다. 항상 자신감도 넘쳤고 매사가 똑 부러졌다. 직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어느 날 TV에 비친 그의 모습은 180도 바뀌어 있었다.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있다는 소문이 돌더니 검찰에 이어 특검 수사까지 받았다고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 탓에 눈에 띄게 얼굴이 초췌했다. 과정과 이유가 어떻든 간에 최순실씨가 미친 마수에 걸려 A처럼 뛰어난 고위관료들이 추풍낙엽처럼 허망하게 명예 실추의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관료사회 역시 한없이 깊은 시름에 빠졌다.
문제는 끝날 듯 끝날 듯하던 이들에 대한 소환이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의혹도 등장하고 있다.
실제 이미 검찰과 특검의 문턱을 넘었던 최상목 기획재정부 1차관은 지난 12일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시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돕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의혹 때문에 참고인 신분으로 특검에 불려갔다. 앞서 10일에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강화된 순환출자 고리 해소를 위한 특혜 의혹과 관련해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과 김학현 전 공정위 부위원장이 특검에 소환됐다. 같은 날에는 정찬우 한국거래소 이사장(전 금융위 부위원장) 등이 삼성바이오로직스 유가증권시장 상장 과정 특혜와 하나은행 본부장 인사에 개입한 의혹을 사 특검 조사를 받았다. 김 전 부위원장은 자택이 압수수색되기도 했고 금융위와 공정위, 그리고 기재부까지 검찰의 압수수색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2일에는 최씨의 단골병원인 ‘김영재의원’의 특혜 의혹과 관련해 정만기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도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출석했다. 평소 자신감에 찬 정 차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시름이 가득한 얼굴로 특검 사무실로 들어가 후배들의 안타까움을 샀다는 후문이다.
더욱이 특검팀이 ‘영혼이 없는 공무원’ 처벌 대상을 정부 부처 차관급과 청와대 비서관 이상으로 결정하면서 수사 결과에 따라 소환된 고위관료들은 형사 처벌을 받게 될 위기에 놓였다. 30년을 쌓아온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잘나가던 에이스 관료들이 왜 그리 쉽게 무너졌을까. 그들 스스로 얘기하는 것처럼 영혼이 없어 알아서 줄서기를 한 것인가. 아니면 절대 권력 앞에 맥없이 당한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에게 ‘나쁜 사람’으로 지목된 노태강 전 문화체육관광부 국장과 진재수 전 과장처럼 상부의 지시가 부당하다고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막강한 권력에서는 바람 앞에 촛불처럼 힘없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항변한다.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B 차관은 “청와대 지시는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경제학에 ‘자기선택 편의(self selection bias)’라는 말이 있다. 자리를 얻기 위해 자기 양심도 선뜻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권력 주위를 맴돈다는 뜻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고위관료들은 결국 자기선택 편의를 잘 순응하며 따른 셈이다. 국민들 입장에서 본다면 영혼 없는 공무원답게 줄서기에 급급했던 셈이다.
안타깝지만 바다 건너 눈에 띄는 외신 기사가 국민의 시선을 잡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해 쫓겨난 샐리 예이츠 전 법무장관 대행의 행보다. 예이츠는 세계적 논란이 일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이민 행정명령에 대해 “행정명령을 변호하는 게 정의를 추구하는 법무부의 책임과 일치하는지, 행정명령이 합법적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며 단호하게 “노(No)”라고 외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이츠를 전격 해임했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항명한 예이츠에 대해 정권에 충성하는 조직원이 아니라 사회 정의를 실천한 공직자라고 치켜세우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최순실 사태로 검찰 문턱을 수시로 넘고 있는 우리 고위공직자들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우리 고위공직자들이 불법적인 지시에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장서 하수인이 되기를 자처하는데 미국의 예이츠 법무장관 대행처럼 우리 사회에도 용기 있는 공직자들이 많아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묵묵히 일하는 대다수 공복(公僕)이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과정에서도 실무자들이 강하게 반대했던 정책은 결국은 추진되지 못했다. 아직도 정신이 살아 있는 공직자들이 많다는 얘기다.
정부 부처의 한 고위관계자는 “에이스로 불렸던 선배들이 검찰의 문턱을 넘고 구속되는 사태를 보면서 과연 공직자의 길을 걸어야 할지 고민이 많다”면서 “왜 그들이 ‘노’라고 외칠 수 없었는지, 그 현실을 곱씹고 곱씹어야만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