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과 파리를 유리병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
벌은 체계적·조직적으로 움직인다. 빛이 비추는 방향에 출구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출구 쪽에 빛을 비추면 금방 유리병을 탈출한다. 하지만 빛이 있는 곳과 출구가 다르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 반면 파리는 빛과 상관없이 이곳저곳 날아다니다 출구를 찾는다.
자신이 아는 정답을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다. 벌과 파리만의 얘기가 아니다. 사람도, 기업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인텔은 퍼스널컴퓨터(PC)의 핵심부품인 마이크로프로세서 분야의 최강자로 1980년대 이후 단 한 번도 선두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손 안의 컴퓨터 스마트폰이 등장하자 인텔은 최고의 인력과 기술로 ‘소피아’라는 최고 성능의 스마트폰 칩을 선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성능은 뛰어났지만 전력도 많이 먹고 열도 많이 났다. 스마트폰에 맞는 정답이 아니었다. 결국 지난해 4월 사업철수를 발표했고 경쟁업체 ARM은 모바일에 특화된 제품으로 시장의 95%를 장악했다.
그렇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2014년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행사장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스마트폰 아우디’라는 광고판이 세워졌다. 인텔은 퀄컴·IBM·엔비디아 등 다른 반도체 업체들과 경쟁하며 새로운 판짜기에 나섰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자. 한 치 앞도 예측이 힘들다. 한마디로 ‘시계 제로’다. 첨단기술이나 제품은 물론이고 국내외 정치나 경제상황·기업환경·소비자 등 뭐 하나 어제와 같은 모습이 아니다.
세상은 갈수록 질서를 잃고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시간이 지난다고 불확실성의 안개가 걷힐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확실해지는 것은 ‘어제의 정답이 더 이상 내일의 정답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벌처럼 변화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인텔처럼 성공의 경험과 지식을 맹신하면 위험한 상황이다.
10년 전 한국을 방문한 앨빈 토플러는 이미 “변화의 속도에 살아남는 국가만이 경쟁력을 갖는다”고 단언했다. ‘혁신’을 요구하면서 과거의 것을 깨뜨리고 기존의 정답을 뛰어넘으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혁신’을 선택하기가 어렵다. 태생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위험은 더 커진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는 것 자체가 더 큰 위험인 상황이고, 오랜 기간 정체돼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잠재된 위험이 더 많이 쌓였다는 뜻이다. 위험의 회피는 더 큰 위험을 선택한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상황도 그랬다. 1826년 영국은 세계 최초로 증기자동차를 만들고 도시 간 정기노선 버스를 운행했다. 마차를 끄는 마부들은 강하게 반대했고 빅토리아 여왕은 자동차를 규제했다. 그러자 자동차 기술자들은 독일로 옮겨갔다. 독일은 자동차 강국이 됐고 영국의 마부들은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마차를 아무리 연결해도 기차가 되지 않는다”며 창조적 파괴,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지난 2010년 미국에서 시작한 차랑 공유서비스 ‘우버’는 한국에서 여전히 불법이다. 이를 비웃듯 우버는 하늘을 나는 비행 택시로 혁신을 이어가고 있다.
‘타임’이 선정한 21세기 혁신가 린다 로텐버그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미쳤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혁신적이지 않다는 뜻”이라며 “모두가 앞으로 나아갈 때 옆으로 가보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신은 사회적 편견과 기득권의 반발, 끝없는 실패, 부정적 여론 등 수많은 저항에 부닥친다. 저항에 굴복하면 실패하지만 극복하면 성공한다. 생존을 위한 혁신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혁신은 저항을 거쳐 비로소 완성되는 만큼 저항에 저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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