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앞 대한문 태극기집회는 영화 ‘국제시장’의 정서가, 광화문 촛불집회는 영화 ‘변호인’의 분위기가 압도했다. ‘국제시장’의 누적관객 수는 1,426만명으로 역대 2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렸다는 영화 ‘변호인’의 누적관객 수는 1,137만명으로 역대 10위다.
우리 국민들은 6·25와 산업화 시대를 다룬 ‘국제시장’을 보며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분들의 고생으로 이렇게 발전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변호인’에서는 ‘군사정권 시대의 민주주의 말살과 탄압이 이 정도였구나’ 하는 것을 보며 새삼 민주화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두 영화를 보고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했지만 이날 광장에서는 달랐다. 이해·공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분노·적대·타도만이 난무했다.
태극기집회에서 만난 A씨는 “젊은 사람들이 가난을 아느냐”며 “배부르고 잘살게 해 줬더니 이제 좌익세력에 나라를 갖다 바치려 한다”고 분노했다.
B씨는 “태극기집회는 아무리 많이 모여도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는다”며 “국회·검찰·언론 등 나라가 온통 좌익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말했다. 60대 기독교 신자인 여성 C씨는 “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나라가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온다”며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심정”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박정희 대통령 체제에 대한 부정이며 이는 곧 해방 이후 건국과 산업화 세대에 대한 부정이라는 논리다. 즉 8·15 광복과 6·25 전쟁 속에서 좌익과의 투쟁으로 나라를 세우고 1960~1970년대 피땀 흘려 산업화를 일궈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설했지만 이제 그 과실을 따먹고 자란 세대가 나라를 ‘좌익’ 손에 넘기려 한다는 주장이다.
태극기집회의 주축인 60대 이상 세대가 태어나고 활동한 해방 후 196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절대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생존하는’ 것이 문제인 ‘실존의 시대’였다. 민주니 자유니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과 ‘100억불수출, 1,000불 소득’을 외치며 ‘잘살기 위해’ 내달렸다. 지금의 60대 이상은 그렇게 살았다. 그게 곧 그들의 인생이었고 삶의 전부였다. 함께 ‘민족중흥’을 외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들 삶의 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박정희 대통령 체제를 탄핵하는 것이고 이는 곧 그들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 ‘태극기집회 참여자’들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소장은 “태극기집회의 기본 메시지는 그나마 과거의 영광을 지켜준 것이 박정희·박근혜 체제인데 이를 부정하는 데 대해 분노하는 것”이라며 “태극기집회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산업화·민주화됐다고 하면서도 이들 60대 이상 세대가 이처럼 상실감을 느끼도록 한 데 대해 짠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반면 촛불시위 측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 경제적으로는 국가중심주의 발전 모델의 최종 종언을 고하는 사태로 해석한다. 즉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지만 권위주의·국가주의 모델은 그대로 유지됐는데 이번에 그 문제점들이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폭발한 사태로 본다.
태극기와 촛불 간 대립을 세대전쟁의 관점에서 보면 촛불시위의 주축 중 하나인 40~50대는 1980~199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다. 이들은 생존보다 ‘민주주의’가 중요했다.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게 되면서 국가·회사에 대한 의무보다 ‘권리’를 함께 생각하기 시작했다.
역시 촛불시위의 주축 중 하나인 20~30대는 풍요의 시대, 소비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의무보다 내 권리가 중요하다. 내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국가나 회사가 있다고 본다. 정치인들도 소비의 대상이다. 내가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했고 그들은 내 정치적 권리를 대리하는 ‘심부름꾼’일 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치운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과거와 같은 정치인들의 절대적 권위가 통하지 않는다.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대통령의 권력을 부여한 박근혜 대통령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본다. 심지어 대통령마저 내 소비의 대상이다.
이처럼 이번 태극기집회와 촛불집회는 세대전쟁의 양상을 뚜렷이 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집약된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 ‘국제시장’과 ‘변호인’을 함께 보고 감동한 것처럼 서로가 살아온 시대적 상황과 삶의 현실, 고민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양측 갈등을 줄이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안의식 선임기자 miracl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