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바투타(Ibn Battuta). 여행가다. 중세 시대에 가장 긴 구간을 걸으며 세상을 글로 남긴 여행가. ‘동방견문록’의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 ~ 1324)보다 조금 후대 사람이다. 출생연도로만 따지면 둘의 시차는 48년. 바투타가 늦다. 마르코 폴로보다 나중에 태어난 바투타는 아프리카 북부와 스페인, 중동, 인도, 중국을 탐사한 저술 ‘여행기’를 남겼다. 동방견문록과 여행기. 둘은 기행문이라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크다,
무엇이 다른가. 문장이 그렇고 신뢰도가 그렇다. 무엇보다 동방견문록은 의심을 많이 받았다. 마르코 폴로가 감옥에서 들은 얘기를 마치 실제 기행문인 양 썼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온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도 의심스러운 대목이 없지 않지만 묘사의 정밀도에서는 동방견문록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븐 바투타는 방문지의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에 대한 풍부한 기록을 남겼다. 풍토와 관습·상품 매매 등 교환제도까지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여행 자체의 규모와 기간도 바투타가 크고 길다. 마르코 폴로가 17년간 20개국(오늘날 국경 기준)을 방문한 반면 바투타는 27년간 44개국을 훑었다. 바투타가 발과 낙타, 말, 배를 타고 다닌 여행 거리 12만㎞는 베이징-파리 구간을 여섯 번 오갈 수 있는 거리다. 마르코 폴로의 3배에 이른다.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은 지난 2007년 3부작 다큐멘터리 ‘이븐 바투타의 놀라운 여행’을 제작하면서 둘을 이렇게 비교했다. ‘뭇별(마르코 폴로) 사이에서 찬란히 빛났던 보름달(바투타).’
1302년 2월24일, 이슬람 문화의 황금기에 튀니지 탕헤르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가업인 법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여정을 시작한 것은 1325년. 나이 21세 때였다. 메카 순례를 위해 16개월이면 돌아오겠다고 고향을 떠난 청년은 27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인도와 중국에서 동아프리카 해안, 서남아시아, 스페인까지 그는 갈 수 있는 세계의 모든 곳을 다녔다. 가는 곳마다 군주들은 그를 반겼다. 인도에서는 술탄이 내린 대법관 지위와 거대한 영지를 뒤로 남기고 여행길에 오른 적도 있다.
바투타는 무엇 때문에 안온한 삶 대신 험난한 여행을 택했을까. 사람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 때문이다. 이슬람 신도들이 모이는 메카에서부터 그는 곳곳에서 온 사람들과 사귀며 같은 길을 함께 걸었다. 바투타는 운도 좋았다. 산적에게 모든 재산을 털리고 직접 전쟁에 참전한 적도 있다. 항해 중에 배가 뒤집혀 애써 모았던 자료가 소실되는 시련도 겪었다. 장기간의 여행 동안 동료들은 모두 죽었어도 그가 끝내 살아남은 비결은 남에 대한 존중. 독실한 무슬림임에도 바투타는 예수에 대해 말할 때면 ‘그에게 평화를’이라는 축원을 달았다. 기독교인들도 그를 언제나 따뜻하게 맞이했다.
오랜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바투타의 말년 은 알려져 있지 않다. 흑사병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생을 어떻게 마감했는지도 모르는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여행기’가 인류의 역사에 남긴 거대한 흔적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굳어져 온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는 너무 더워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세계관이 바투타로 인해 깨졌다. 동방견문록을 반신반의하던 유럽인들은 바투타의 여행기를 접한 뒤 비로소 배를 타고 아프리카 해안을 돌아 희망봉과 인도항로를 찾아냈다. 바투타의 발에서 대항해의 시대가 열리고 오늘날 글로벌 질서가 형성된 셈이다.
한국은 이븐 바투타에 관한 한 남다른 자산을 갖고 있다. 프랑스에 이어 아랍어 원전 ‘여행기’를 완역한 두 번째 나라다. 세계적인 이슬람 학자 정수일 박사의 번역 덕분이다. 조선족 출신의 북한 공작원 ‘무함마드 깐수’로 더 유명한 정수일 박사는 1996년 간첩 행위로 체포돼 12년형을 선고받은 뒤 5년 만에 특사로 풀려나 ‘여행기’를 지난 2001년 우리말로 풀어서 펴냈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에 따르면 이븐 바투타의 한국어 번역본은 우리 사회가 가진 포용력의 소산이다. ‘정 박사를 우리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그의 학문적 재능을 이데올로기의 희생물로 사장시켜버렸다면, 여행기 완역은 거의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븐 바투타는 ‘여행기’에서 고려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의 여행기와 한국은 700년에 가까운 시차를 뛰어 넘는 공통점이 있다.
타자에 대한 관심과 이해로 여행기를 남긴 이븐 바투타. 만주국에서 태어나 북한 국적으로 중국과 카이로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간첩이자 학자로 활동했던 디아스포라(유랑)의 정수일. 아랍인 무함마드 깐수로 위장해 간첩 활동을 했던 정수일을 풀어주고 학자로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포용한 한국 사회…. 한국어판 여행기의 책갈피에는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넓은 가슴으로 미지의 세계를 향했던 이븐 바투타의 뜻이 스며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