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고객의 유전체 분석능력 의심 ‘네이처’ 자매지 논문 게재로 잠재워
정현용 대표는 서울대 미생물학과 88학번이다. 마크로젠 대표가 된 지금이야 당연한 선택 같지만 당시 왜 미생물학과를 선택했을까. 정 대표는 “제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언론에서 유전공학이 열어줄 가능성에 대해 대서특필했다”며 “막연하게 뿌리에는 감자, 줄기에는 토마토가 열리는 신기한 식물을 만드는 것이 유전공학의 미래처럼 여겨지던 때라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이지만 당시만 해도 미생물 관찰이 가능한 수준의 현미경 등 연구장비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정 대표는 “대학에서 본 것은 농활에 가서 본 식물들의 모습뿐”이라며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바이오 산업의 기본인 눈으로 보고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류하는 법 등을 배운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대학원 박사까지 줄달음질 쳤다. 1993년 목암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가 연구 활동을 하던 그가 마크로젠에 입사한 것은 서정선 회장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서 회장이 마크로젠을 창업하기 전인 1994년, 정 대표는 목암연구소 연구원 신분으로 서 회장이 교수로 몸담았던 서울대 의대 연구실과 두 달 간 공동연구를 하게 됐다.
서 회장은 정 대표에게 바이오 산업에서 조(兆) 단위 매출 기업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정 대표에게 서 회장은 상아탑에 안주하는 대부분의 교수들과 달랐다. 미국의 바이오 벤처기업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기업가 정신이 돋보였다.
서 회장이 마크로젠을 설립한 1997년 해외 연수 중이었던 정 대표는 1999년 국내에 들어와 마크로젠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됐다. 마크로젠은 정 대표가 합류한 이듬해인 2000년 2월 바이오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코스닥 시장에 입성했다.
정 대표에게 가장 힘든 시기는 상장 직후였다. 그는 “서 회장이 당시만 해도 연간 연구비가 1억원이 안 되는 학계의 틀을 벗어나 제대로 연구를 해보자고 해서 상장을 했는데 투자자들과의 약속도 지켜야 하고, 이제는 연구의 성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상품을 만들고 회사를 키워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고 털어놨다.
투자자들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이익을 내야 하는데 바이오 산업의 토양이 척박했던 당시 국내 어느 곳에서도 마크로젠의 상품을 원하지 않았다. 대부분 바이오 기업이 문을 닫는 상황으로 내몰린다는 ‘데스 벨리(죽음의 계곡)’를 만났다. 시장을 찾아 해외로 나갔지만 어려움은 이어졌다. 지금이야 해외 고객들이 “당신이 마크로젠의 대표냐. 정말 만나보고 싶었다”며 먼저 악수를 청하지만 당시에는 영 딴판이었다. 회사 소개를 듣는 해외 고객들은 ‘한국이 무슨 바이오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연구원으로 잔뼈가 굵은 정 대표는 특유의 열정으로 난관을 하나하나 극복해갔다. 그는 2000년 자이모모나스(포도당·과당 등을 에너지원으로 살아가는 혐기성 세균)라는 미생물의 유전체 분석 프로젝트를 주도해 6개월 만에 완전 해독하는 쾌거를 이뤘다. 우리나라는 생명체의 전체 염기서열을 분석해낸 세계 여덟번째 국가가 됐다. 이어 2005년에는 자이모모나스의 유전체 정보를 이용해 알코올 생산능력을 20% 이상 높인 ‘슈퍼 알코올 박테리아’를 개발, 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과학저널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에 게재했다. 덕분에 해외고객들에게 “우리를 믿어달라”며 더 이상 호소하지 않아도 됐다. 신뢰 부족으로 고전하던 그와 회사에게 네이처 게재는 ‘보증수표’ 구실을 톡톡히 했다. 매출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마크로젠은 지난해 911억원을 달성했다. 150개 넘는 국가의 연구자들로부터 유전체 분석 서비스 등을 수주, 매출의 70% 이상을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마크로젠의 주요 고객은 일반소비자가 아니라 유전체 분석 등을 의뢰하는 연구자들이다.
정 대표는 “다양한 토질이 섞인 곳에서 어려움을 이겨내며 자란 포도주가 향이 좋듯이 앞으로 닥칠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더 좋은 기업으로 성장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