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의 ‘흥(興)’과 ‘망(亡)’이 그대로 스며 있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1970년대 대한민국 부흥의 상징인 강남 대개발의 중심.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동력이었던 벤처 붐이 싹텄고, 대한민국의 자존심인 삼성그룹의 본사가 빠진 자리를 이제는 ‘스타트업’이 채우고 있는 그곳. 그 테헤란로의 자맥질이 내려다보이는 개인사무실에서 서울경제신문이 만난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78·사진)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우리 경제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몸에 새긴 우리 경제는 이제 스스로 굴러갈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섰다는 게 김 교수의 진단. 그는 “경제라는 게 관성이 있다”며 “우리나라 경상수지 흑자가 세계에서 네 번째는 될 만큼 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탄핵에 따라서 갑자기 가속도가 붙어 앞으로 나가거나, 갑자기 멈춰서 나뒹굴거나 그러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대담=이철균 경제부장 fusioncj@sedaily.com
김 교수는 “탄핵이 인용됐다고 경제가 갑자기 침하하지는 않는다”며 “과거의 힘은 그대로 이어지겠지만 평행으로 가느냐 점진적으로 상승하느냐 침하하느냐가 문제다”고 말했다.
추락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장 올해부터 문제는 생길 수 있다.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 그리고 정부 전망에 따르면 올해 우리 경제의 성장률은 2.5% 내외. 근거는 설비투자의 증가와 수출의 회복이었다. 김 교수는 “설비투자랑 수출을 누가 하느냐, 기업이 한다”며 “기업 경영활동의 유인(incentive)을 생각하면, (특히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기업이 야심을 가질 만한 여건이 크게 악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국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문제도 있고 미국과 중국의 보호무역 경쟁도 있다”며 “수출이 늘어나는 것에 찬물을 끼얹는 것 아닌가 싶다”고 우려했다. 기업을 뛰게 만들지 못하면 당장 올해 성장도 예상보다 못할 수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진단이었다.
김 교수는 운동장이 망가진 배경에는 잘못된 피아(彼我)의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인지를 가리는 기준이 불분명하다 보니 되레 가까이 있는 특정 집단을 미워하고, 그로 인해 ‘극단적’ 대립이 생긴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대기업이다. 김 교수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재벌 체제, 중립적으로 얘기해 대기업은 투명경영 등의 문제도 있지만 투자 결정의사가 빠르다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삼성의 반도체 투자, 그리고 최근의 바이오 투자는 일본도 못하는 것”이라며 “잘못한 일이 있다고 재벌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권을 잡으면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성장 잠재력에 큰 ‘삭감’ 효과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노조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관행인 ‘고용세습’을 앞세운 귀족노조를 비판했다. 김 교수는 “노동시장은 조직화 된 세력(노동조합)이 있는 노조와 세력이 없는 하청기업 노조로 양분화돼 있는데, 세력 있는 쪽은 그야말로 ‘내부자’”라며 “재벌만 문제가 아니라 고용세습하는 귀족노조도 우리 경제의 암적 존재”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치권이 하청기업에 있는 대다수 노동자를 껴안는 정책을 하려면 결국 귀족노조를 깨야 한다”고 덧붙였다.
탄핵 이후 격화하고 있는 ‘촛불’과 ‘태극기’의 갈등도 같은 범주다. 김 교수는 이를 이념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 갈등이라는 틀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부분 현실 생활에서 겪는 좌절감 때문에 (광장으로) 뛰어나왔다”며 “아들 세대는 아버지가 겪었던 (6·25전쟁 등) 여러 좌절을 인정하고 아버지 세대도 아들의 좌절을 이해해서 서로 포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번 탄핵을 계기로 잘못된 피아의식으로 인한 갈등, 그 같은 대립 구도 위에 기생하는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최근 불거진 사드 갈등을 놓고 김 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큰 패착이라고 지적했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톈안먼에 올라갔을 때만 해도 이제는 미국이 떨어져도, 일본이 떨어져도, 중국만 붙들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있었다”며 “(사드 보복으로) 중국의 민낯을 봤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가 광복 이후 이만큼 큰 것은 중국이 세계무대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제는 아니다”라면서 “미국과 달리 중국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민들이 (중국의 대해 패권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 여행수요가 10%만 돌아와도 중국이 관광객을 안 보내는 타격이 사라진다”며 “골프도 이제 맘 놓고 칠 수 있게 하는 등 국내 소비를 증가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해묵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번 대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김 교수는 대선 주자들이 결코 ‘쉬운 해법’만을 찾지 말라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유력 대권 주자가 공공 부문에서 일자리를 늘린다고 했다”면서 “문제는 공무원이 늘어나면 그만큼 규제도 늘어난다. 공공 부문 증가는 곧 규제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밑바닥에 깔린 병을 확실히 고쳐야 하는데, 환부를 괜히 건드리면 오히려 덧난다”고 덧붙였다.
대선의 화두인 복지 이슈를 놓고서도 기계적인 재정확대보다는 전달체계 개선이 우선이라고 주문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의료전달체계가 미국보다 낫다지만, 지금도 상당히 낭비가 많다”며 “복지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상법개정안에 대해서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금과옥조라고 배우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라며 “전문경영인 체제가 오히려 쇼터미즘(단기실적주의)으로 갈 수 있다.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야 하는데 정치권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우려했다. 그는 중국의 예를 들며 “10년이라는 긴 호흡으로 ‘일대일로’ 같은 정책을 하니 사회가 안정돼 보인다”며 “새 정부가 들어서면 부처 이름부터 바꾸는 데 그보다는 (국민에게) 구상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다만 혼란기를 지켜야 할 공무원 집단의 사기가 크게 꺾여 있는 점을 우려했다. 그는 “공무원이야말로 혼란기를 지키는 중심세력인데, 박 전 대통령이 이 사람들의 사기를 끊었다”고 말했다.
/사진=권욱기자 정리=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