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는 오후 혹은 밤늦게 받는 것’, 택배 배달하면 떠올리는 통념이다. 택배 기사들이 아침 일찍 물류센터에서 택배터미널로 들어온 화물을 오전 내내 분류한 다음 오후에 집집마다 배송하다 보면 이미 한밤중인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긴급하게 보내는 물건이 아니라도 오전 중에 받을 수 있다. 앞으로는 오전·오후 편한 시간대에 택배를 받는 일도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택배터미널에 자동화가 도입된 덕분이다.
지난 9일 기자가 방문한 인천 계양구 서운동 소재 CJ대한통운(000120) 서울강서B터미널. 이곳에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마곡동, 내발산, 외발산동, 우장산동으로 가는 택배 화물들이 옥천·대전 등 전국 각지의 허브(거점)터미널에서 11톤 대형 트럭을 타고 모인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화물 수 천여 개가 터미널에 도착해 행선지에 따라 분류되고 있었다. 모든 택배기사들이 화물을 일일이 확인하며 자신들이 배달해야 할 것을 챙기고, 각자 상·하차 작업에 바쁜 풍경을 상상했지만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물건은 자동으로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자신의 트럭 쪽으로 옮겨졌고, 기사들은 잠시 쉬고 있었다. ‘휠 소터 (Wheel Sorter)’라는 이름이 붙은 현장 분류 자동화 설비 덕분이었다.
◇자동화된 터미널에서 화물 분류는 기계가 알아서 =휠 소터는 작은 바퀴들을 이용해 택배 상자들을 배달지역별로 분류해주는 설비다. CJ대한통운은 지난해 11월 말부터 휠 소터를 전국 터미널 중 5곳에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강서B터미널 외에도 울산에 2곳, 광주광역시와 경기도 남양주시에 1곳씩 설비를 들였다. 핵심은 상품 정보를 수신하는 스캐너와 초속 2m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는 휠 및 컨베이어다.
우선 택배터미널에 도착한 화물은 컨베이어를 타고 대형 스캐너를 통과하게 된다. 터미널 직원들은 물건이 스캐너를 통과하기 전에 원활히 스캔이 이뤄지도록 화물의 위치를 조절한다. 스캐너에서 택배 상자에 붙은 바코드를 통해 판독하는 정보는 상품의 종류, 자세한 행선지 등이다. 휠 소터는 수신한 화물의 정보에 따라 컨베이어를 타고 움직이는 화물을 배송해야 하는 지역으로 이동하는 택배기사들의 트럭 쪽으로 자동으로 보낸다. 화물이 컨베이어를 지나다가도 소형 휠이 방향을 자동으로 바꾼다. 택배기사들은 분류돼 나온 화물을 각자의 트럭에 싣기만 하면 된다.
CJ대한통운은 스캐너를 통해 수신한 택배 화물들의 정보를 배차 등 전반적 운영에도 활용하고 있다.
회사 측에 따르면 자동화 설비의 스캐너는 상품정보뿐 아니라 부피, 무게 등 체적 정보도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부피가 상대적으로 크고 작은 물건들이 어느 시기에 많이 배송되는지 빅데이터를 분석한 다음 어떤 크기의 차량을 투입할지 결정하는 식이다. 회사 관계자는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봄·가을엔 의류 등 체적이 적은 물건의 배송 비율이 높았고 겨울에는 부피가 큰 상품의 비중이 컸다”며 “그에 맞춰 효율적으로 배차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동화 이후 오전 배송 가능해져… 반품 회수율도 향상=자동화의 영향은 여러 부분에서 다양하면서 컸다.
우선 터미널에서 행선지별로 분류하는 작업이 간소해지면서 배송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 시켰다. 덕분에 오전에도 택배를 받을 수 있다. 자동화 설비가 들어오기 전에는 오전 내내 택배기사들이 직접 분류한 물건들을 일일이 트럭에 실은 다음 오후에 각 지역으로 배송하곤 했다. 자연히 오후 늦게까지 작업이 계속됐다. 반면 자동화 후에는 오전에도 정해진 시간까지 분류가 끝난 물량만 먼저 배송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기사들은 오전 배송작업을 마치고 터미널로 복귀해서 오후에도 남은 화물을 전달할 수 있다.
회사 관계자는 “긴급 물품이 아닌 일반 택배도 오전에 받아보는 일이 가능해졌다”며 “택배를 받아볼 사람이 오전에 부재해도 오후에 다시 찾아가서 물건을 전달할 수도 있게 됐다”고 말했다. 혹은 오전, 오후 중 물건을 받을 수 있는 시간대를 조율할 수도 있다.
택배를 통해 반품을 해야 할 때 기사들이 물건을 제때 가져가는 반품 회수율도 90%대까지 끌어올렸다. 강서B터미널을 관리하는 박배훈 차장은 “택배회사를 이용하는 업체들은 물건이 제대로 반품되는지를 상당히 중시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쇼핑 사용자가 택배회사를 통한 반품을 요청했는데 정작 화물이 수거되지 않아 행방이 묘연해지면 쇼핑몰 업체나 택배회사, 이용자 모두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 택배기사들의 노동조건도 개선돼= 강서B터미널 소속 택배기사들의 근무시간은 이전보다 2시간 줄어들었다. 택배 기사들은 대리점별로 조를 짜서 매일 오전 7시, 9시, 10시 30분 3회에 나눠서 출근한다. 10시 30분에 출근하는 사람은 출근 시간이 2시간가량 늦춰졌고, 일찍 출근한 사람은 퇴근 시간이 이전보다 1~2시간 앞당겨졌다. 기계가 알아서 화물을 분류해주니 최소 인원만 아침 일찍 출근해도 업무에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자동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고 기사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 강서구에서 택배 대리점을 운영하는 택배업 종사 8년 차인 김지환 씨는 “출근시간을 조정할 수 있게 되면서 자녀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거나 학교에 데려다 주고 출근하는 기사들도 늘었다”며 “자동화 이후 배달 물량이 50% 늘었지만 오전·오후 나눠서 배송하기 때문에 힘은 이전보다 덜 든다”고 말했다.
CJ대한통운 측은 내년까지 전국의 모든 택배 터미널에 자동화 설비를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우선 올해까지 80곳에 자동화 설비를 설치하고 내년 4월까지는 터미널 200곳에 모두 휠 소터를 들일 계획이다. 회사 측은 이를 위해 총 1,227억원을 투자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인천=박준호기자 violato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