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16일 자살보험금 미지급 건과 관련된 제재심의위원회 재심을 통해 삼성·한화생명에 대해 지난달 23일 내렸던 징계 수위를 하향 조정했다. 뒤늦게나마 전액 지급을 결정하면서 기관 징계는 영업 일부 정지에서 기관 경고로, 대표이사 징계는 문책경고에서 주의적 경고로 낮아지면서 대표직 연임이 가능해졌다. 이로써 지난 10년간 거듭해온 자살보험금 논란이 일단락됐지만 금융 당국과 보험업계 양측 모두 상처만 입고 출구는 찾지 못한 채 어설프게 봉합된 격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금감원의 강경 방침에 결국 모든 보험사가 자살보험금을 전부 지급하기로 했지만 일반 사망보다 자살에 더 많은 보험금을 주도록 결론이 나면서 향후 극소수일지라도 보험금을 위해 그릇된 선택을 하는 계약자가 나올 수 있는 ‘위험한’ 구멍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보험업계와 금융 당국이 뒤늦게나마 자살을 방조할 수 있는 기존 계약을 무효화할 수 있는 대안 찾기에 나섰지만 현재로서는 자살 예방 노력 강화 등의 모호하고 간접적인 대책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보험업계와 금융 당국에 따르면 이번 논란이 거듭되는 동안 보험사들은 약관조차 제대로 못 만든다는 근본적인 비난과 함께 소비자 신뢰도 추락, 주주 이익 침해 등의 비판에 시달렸다. 금감원 역시 감독 소홀, 뒷북 제재, 법리 무시 등의 비판에 휩싸였다. 또 제재심을 거듭 열면서 향후 금감원 제재 절차의 신뢰도와 무게감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됐다. 더 큰 문제는 양측 모두 상처투성이가 됐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해당 계약에 대해서는 사망보험금 지급 시 일반 통념은 물론 사법적 판단에도 어긋나는 ‘자살을 재해로 봐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대에 체결된 후 여전히 유효한 자살재해사망특약은 280만건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보험업계에서는 “보험금을 많이 줘야 한다는 문제를 넘어 이제는 자살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을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금감원 역시 기존 계약에만 초점을 맞추다가 미래 위험을 조장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비난을 의식하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내부적으로 업계와 함께 잔존 계약의 효력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대안 찾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검토되고 있는 대안은 금융 당국의 행정명령과 보험사가 다른 계약으로 대체해주는 방식 등이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금융위원회의 약관변경명령권 발동에 대해 실현 가능성이 낮은 시나리오라고 평가했다. 보험업법에 명시는 돼 있지만 한 번도 발동된 적이 없는데다 금융 당국이 금융 소비자 이익 침해 소지가 있는 ‘위험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김선정 동국대 법학과 교수는 “금융위의 약관변경명령은 ‘장래 소비자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기존 계약에 소급 적용될 수 있다”며 “하지만 자살재해사망특약의 효력을 없애는 건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계약자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융 당국이 이를 선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학계 전문가는 “금융위 입장에선 정치적으로 공격받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사안”이라며 “금융위가 자살을 방조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관점으로 접근해 약관변경명령을 검토하더라도 정치권에서는 정부 부처가 나서서 소비자 권리를 침해하려 한다며 집중포화를 퍼부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더해 “대선과 새 정부 출범 후 정부조직 개편을 앞둔 상황에서 금융위가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는 시각도 있었다.
약관변경명령과 더불어 대안으로 제시되는 승환계약(다른 상품으로 변경)에 대해서는 보험사들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280만건에 달하는 자살재해사망특약에 대해 일괄 적용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계약자에게 일일이 통보하기도 어렵고 계약자가 상품 갈아타기를 거부하면 어찌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현재 남아 있는 계약들의 보장금액과 잔존 보장기간이 모두 제각각인 상황에서 계약자에게 맞는 상품으로 일일이 바꿔주는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게다가 가뜩이나 이번 사태로 소비자 신뢰도가 떨어진 상황에서 계약 변경을 요청하면 불신감만 더 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 교수는 “자살보험금 논란이 여기까지 온 상황에서 출구를 찾는 건 어렵다”며 “자살과 관련해서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일본처럼 보험사와 금융 당국뿐 아니라 법조계, 더 나아가 사회 전반적으로 현재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어나가는 게 현시점의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