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체제를 맞아 새로 출범한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내년도 의약품 심사비를 예년의 2배 수준으로 대폭 확대하면서 미국 시장 진출에 사활을 걸고 있는 국내 바이오·제약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당초 기대를 모았던 신약 승인기간 단축 대신 심사비 인상을 통한 자국 기업 챙기기가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22일 로이터와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FDA는 최근 2018년 전체 예산안 중 심사비 총액을 20억달러로 책정했다. FDA 심사비는 제약업체가 글로벌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미국에 의약품과 의료기기 등을 정식으로 시판하기 위해 내는 일종의 승인비용이다. 올해 책정된 FDA 심사비 총액이 11억9,000만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2배 가까이 늘어나는 셈이다.
심사비 총액은 FDA가 매년 승인하는 신약의 규모를 가늠하는 척도이기에 표면적으로는 FDA 허가를 받는 신약 품목이 늘어날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 들어 FDA가 허가를 내준 신약 품목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 변수다. FDA는 지난 2011년부터 2015년까지만 해도 연평균 37종의 신약을 허가했지만 지난해에는 22종에 그쳤다. 질환의 치료과정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신약 후보물질 발굴도 어려워지면서 올해도 20종 안팎에 그칠 것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FDA의 심사비 총액 인상이 사실상 개별 신약의 심사비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임상을 성공적으로 마친 신약이 FDA의 최종 승인을 받으려면 통상 67만달러(약 7억5,000만원) 정도의 심사비가 소요된다”며 “신약 개발의 특성상 단번에 FDA 승인을 획득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고 많게는 10여차례 이상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심사비 인상이 상당한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벌써부터 FDA의 심사비 인상이 미국 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다국적제약사에게 전적으로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막강한 자본을 앞세운 다국적제약사는 FDA의 심사비 인상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비용뿐만 아니라 신약 허가를 신청하는 경쟁력에서도 유리한 고지에 설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FDA는 임상시험을 3상까지 마친 신약에 대해 예비심사와 자문위원회 검토를 거쳐 최종 승인 여부를 결정하며 통상 1년 안팎이 소요된다. 국내 기업들에게는 심사비 인상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승인 신청 차질을 야기하고 이는 결국 신약 출시 연기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FDA의 승인을 받은 국산 신약은 현재 모두 6종이다. 지난 2003년 LG화학(LG생명과학)의 항생제 ‘팩티브’를 시작으로 2013년 한미약품의 역류성식도염 치료제 ‘에소메졸’과 2014년 동아에스티의 항생제 ‘시벡스트로’가 미국 진출에 성공했다. 지난해에는 대웅제약의 항생제 ‘메로페넴’, 셀트리온의 관절염 치료제 ‘램시마’, SK케미칼의 혈우병 치료제 ‘앱스틸라’가 FDA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았다.
이상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바이오의약 프로그램디렉터는 “트럼프정부가 제약기업 친화적인 인물을 FDA 국장으로 선임하고 신약 승인기간 단축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이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자국 기업”이라며 “막강한 자본과 인력을 갖춘 다국적제약사에 맞서야 하는 국내 기업들로서는 더욱 힘겨운 경쟁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