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구조조정을 검토할 때 수십 년 간 경험을 쌓아온 경영자들이 참여하고 회계·금융기관의 지원도 받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재무(구조조정)는 그런 전문적인 지원이 없습니다. 서울회생법원은 기업도 중요하지만 재정 파탄에 이른 개인을 위해 ‘치유적 후견자’로서 본분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경춘 초대 서울회생법원장은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이 같은 포부를 밝혔다. 계속된 불황으로 개인 회생·파산 신청자가 연 15만명에 이른 상황에서 법원이 이들의 실질적 재기를 돕고 경제의 뿌리를 든든히 하는 허브(hub)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또 “기업이 신뢰할 수 있는 계획을 들고 법원의 도움을 요청하면 신속히 구조조정을 진행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착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인천지법 수석부장판사와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장 겸 회생·파산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며 개인·기업의 도산 제도 정비에 앞장서왔다. 그런 그는 회생·파산 절차에 대한 부정적 사회 인식을 큰 문제로 지적했다. 이 원장은 “전국에서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 수는 100만명을 넘어섰는데 법원에 구제를 신청하는 개인은 15만명 밖에 안 된다”며 “인식만 바뀐다면 법원의 도움으로 잠재적 재정 파탄자들이 선제적 치료를 받고 재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한층 효율적인 개인 회생과 관련해 “서울회생법원은 단지 채무 조정에 머물지 않고 여러 기관과 협력해 재취업부터 가정 화합까지 아우르는 기능을 수행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는 “재정 파탄은 가정 파탄의 중요한 원인”이라며 “가정 파탄 사건 당사자들이 회생 절차도 이용할 수 있도록 가정법원과 연계하는 방안을 조만간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회생절차를 거친 개인이 고용노동부의 각종 취업지원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방안도 연구 중”이라고 덧붙였다. 개인들이 ‘삶에 낀 거품’을 걷어낼 수 있도록 법원이 앞장서 돕겠다는 구상이다.
이 원장은 대우조선해양 등 덩치 큰 기업들의 회생절차(법정관리) 문제가 ‘뜨거운 감자’임을 의식한 듯 특정 기업의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기업이 구조조정 방식으로 회생절차를 선택하느냐 마느냐는 채권자와 기업이 선택할 일”이라며 “법원은 기업의 회생 계획안이 신뢰할 만한지 검토한 뒤 신속하게 구조조정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회생법원 소속 법관들은 효율적인 기업 회생 임무 수행을 위해 제도 정비뿐 아니라 회계·금융 지식 습득에도 힘을 쏟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서울회생법원은 기존 법정관리를 한 단계 개선한 ‘한국형 프리패키지 제도(P플랜 회생절차)’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다. 기존에는 채권단이 채무를 탕감해주고 기업에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워크아웃과 법원이 채권자·기업의 계획안대로 채무재조정을 단행하는 법정관리가 분리돼 있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회생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P플랜 회생절차는 기업이 초기부터 회생절차를 염두에 두고 채권단과 채무 재조정, 신규 자금 지원을 논의해 시간 낭비를 줄일 것으로 기대된다. 이 원장은 “P플랜 회생절차를 실시하면 빠르면 2개월 내 구조조정을 마무리 짓고 기업은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위기에 빠졌다 P플랜으로 빠르게 재기한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사례가 모범”이라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P플랜이 중견기업들도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좋은 기술을 갖추고 어느 정도 뿌리내린 기업이 갑자기 빚 부담이 커지며 망하는 안타까운 사례를 수없이 봐왔다”면서 “이처럼 ‘성실하지만 불운한’ 기업들은 신속한 적시 회생절차만 거친다면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또 “법원은 좋은 제도가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회생 전문가 육성에도 적극 투자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