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콩도르세의 낙관, 가능할까?






기본 소득 실시와 공교육 강화, 여성 권리 증진, 헌법 개정, 다수결 표결 방식 변경…. 21세기 한국의 대권 주자가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인 니콜라 콩도르세(Nicolas de Condorcet)가 추구했던 이상이다. 수학자이며 정치인이기도 했던 그는 인종 차별 철폐에도 애썼다. 군중의 생각이 끓는 죽처럼 바뀌던 프랑스 혁명기,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채 죽었으나 그 생각만큼은 오늘날까지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살아 있다. 경제학에도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콩도르세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1743년 프랑스 북부 엔 주의 후작 집안에서 출생, 부친을 일찍 여읜 것 말고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에는 수학 신동으로 알려졌다. 예수회 학교와 파리 나바르 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22세에 전문서적을 쓸 만큼 수학에 뛰어났다. 26세에 파격적으로 과학학회 정회원에 선출된 후 볼테르, 애덤 스미스 등과 교류하며 당시 프랑스 학계의 최대 과제였던 ‘대백과사전’ 편찬에서 경제 분야를 맡았다.

관운도 좋았다. 지방 조폐국장, 프랑스 아카데미 사무총장까지 올랐다. 어릴 적부터 촉망받고 소년등과(少年登科)한 인재로 명망은 높았어도 정작 결혼은 늦었다. 사교성이 부족하고 여성에게 부끄러움을 타던 그는 42세에야 20년 연하의 아내 소피를 맞았다. 파리 최고의 미인이라는 세평 속에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인 라파예트 장군과도 염문을 뿌렸던 소피는 결혼 뒤에 집을 개조, 지식인들의 사교장으로 만들었다.


콩도르세 후작부인의 살롱은 파리의 명물로 떠올랐다. 콩도르세 역시 아내의 살롱을 통한 활발한 지적 교류를 통해 주요 작품들을 펴냈다. 확률을 정치에 대입, ‘선거 결과가 유권자들의 의도와 달라질 수 있다’는 ‘콩도르세의 역설(Condorcet Paradox)’이 담긴 논문 ‘다수결 확률 해석 시론(1785)’도 결혼 직후 발표됐다. 콩도르세의 역설은 요즘에도 투표 제도 변경 논의가 나올 때마다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1972년 케네스 애로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안겨 준 ‘불가능성 정리’는 콩도르세 역설의 연장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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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도르세가 남긴 가장 큰 흔적은 교육. 1791년 시작된 입법의회의 공공교육위원장을 맡은 그는 획기적인 보고서와 법안을 내놓았다. 콩도르세는 ‘공공교육의 전체 조직에 관한 보고서와 법안’에 신분과 재산, 성별을 뛰어넘는 교육 평등과 완전 무상교육 실시, 종교적 색채 배제 등을 담았다. 그는 ‘교육이 국가의 안정과 국민의 건강, 더 많은 일자리,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선사할 것’이라고 설득했으나 기득권층의 반발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대혁명 이래 현재까지 프랑스 공교육의 역사는 콩도르세 보고서를 이행해온 발자취에 다름 아니다.

노예제도와 노예 무역 및 노동의 폐지를 주장했던 콩도르세는 혁명 직전 ‘흑인의 벗’ 협회를 만들어 회장 자리도 맡았다. 1791년 프랑스령 생 도밍그의 사탕수수 농장 전역에서 흑인 노예들의 반란이 터지자 자본주들은 책임을 ‘흑인의 벗’ 등 노예 폐지론자들에게 돌렸다. 마침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가 온건파인 지롱드파보다 강경파인 자코뱅파로 쏠리던 상황. 콩도르세가 기초한 헌법도 논쟁 끝에 채택되지 못했다. 콩도르세를 포함한 반대파 지식인들은 자코뱅파의 ‘블랙 리스트’에 올랐다.

콩도르세는 몸을 피했다. ‘최고의 클럽, 공화국의 중심’으로 불렸던 콩도르세 후작부인의 살롱에 드나들던 지식인들과 도망치다 체포된 바로 다음 날인 1794년 3월28일, 감옥에서 갑작스레 죽었다. 독을 억지로 먹였다는 타살설이 돌았다. 콩도르세의 미망인은 공포정치의 시대가 지난 뒤 살롱을 다시 열고 남편의 유작을 정리하고 알리는 데 남은 생을 바쳤다. 영국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도 불어로 번역, 프랑스에 알렸다.(콩도르세 부부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엘리자는 17세에 아일랜드 독립운동 지도자이며 나폴레옹 군대의 장군이던 오코너(당시 44세)와 결혼했다.)

콩도르세는 피신 와중에서도 책을 썼다. 최대 역작으로 손꼽히는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1794)’에는 국가가 국민들에게 일정액을 나눠주자는 ‘기본 증여’ 아이디어가 나온다. 기본소득 도입을 주창한 것이다. 콩도르세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이 끝없이 진보할 것이라고 믿었다. 관건은 ‘국가 간 불평등’과 ‘각 국가 내의 불평등(빈부 격차)’의 제거. 콩도르세는 민법과 세법을 손 보면 부의 과도한 축적이나 특권을 막을 수 있다고 봤지만 과연 그럴까. 콩도르세가 우려한 정치 현상(콩도르세의 역설)은 현실로 나타났다. 반면 자신했던 경제 현상(빈부 격차 해소와 끝없는 진보)은 갈수록 가능성이 멀어지는 것 같다. 콩도르세의 낙관이 실현되면 좋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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