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기업들이 국내에 세운 법인이 국내 법망을 피해 해마다 본국으로 막대한 돈을 보내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유한회사는 외부감사 공시 의무가 없다는 점을 이용해 국민들의 눈을 가린다. 관련 법을 고치려는 논의는 국회에서 가로막혔다. 5월 대선을 앞뒀다고는 하지만 ‘감시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국회와 정부가 할 일은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4일 국회와 관련 부처에 따르면 유한회사를 외부감사의 대상으로 포함시키는 내용의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된 상태다. 지난 1월3일 해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 논의가 급물살 탈 것으로 전망됐지만 개정 논의는 3월 임시국회의 마지막 법안심사소위가 열렸던 지난달 23일까지도 마무리되지 못했다. 논의가 불발된 주된 이유는 ‘시간 부족’. 통상 3일에 걸쳐 진행되는 법안 심사가 대선을 앞둔 탓에 단 하루에 불과했다. 정무위 소속 한 의원실 관계자는 “외감법 개정을 당시 법안소위의 가장 첫 번째 안건으로 다뤘지만 합의에 실패했다”고 전했다. 4월 임시국회가 열리면 논의가 재개될 수 있지만 불과 한 달 뒤로 다가올 대선 일정에 장담할 수 없다.
정부가 발의한 외감법 개정안은 유한회사에 타깃을 맞추고 있다. 유한회사는 그동안 외부 감사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악용해 출자자의 이익 극대화만 추구하고 거래처와 채권자 등 이해 관계자에게 회계정보를 알리는 데 소홀했다. 2010년 상법이 개정되면서 유한회사의 사원(50인 이하) 및 최저 자본금(1,000만원 이상) 제한과 지분양도 제한 규정 등이 없어졌지만 외부 감사 및 공시 면제 조항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주식회사보다 설립이나 운영상의 장점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2015년 말 기준 국내에 설립된 유한회사는 2010년(1만7,554개)보다 9,304개 증가한 2만6,858개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에 유한회사 제도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제도로 이용됐다. 비상장 유한회사로 회사를 등록해 운영할 경우 주식회사와 달리 매출이나 영업이익, 배당금·로열티·기부금 등 재무정보를 공시할 의무가 없다. 또 이들이 해외 대주주 배당이나 본사 로열티로 얼마를 가져가는지, 한국 내 기부금이 얼마나 되는지 등의 정보를 알 길이 없다. 루이비통코리아와 구찌코리아, 애플코리아·한국마이크로소프트 등은 주식회사에서 유한회사로 법인 형태를 바꿨고 샤넬코리아·에르메스코리아·프라다코리아·구글코리아·페이스북코리아 등은 진출할 때부터 법인을 아예 유한회사로 설립했다.
외국계 기업이라도 감사보고서를 공시하지만 규정은 다소 헐겁다. 국내 기업은 외부감사 대상 기준으로 △자산총액 120억원 이상 △자산총액 70억원 이상이고 ①부채총액 70억원 이상 또는 ②종업원 수 300명 이상 △주권상장법인 또는 주권상장 예정법인 등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계의 경우 기본적으로 외감법상 외감 대상은 아니지만 외국 기업의 국내 지점 형태로 운영되는 국내 법인이라면 감사보고서 공시 의무는 있다. 외국계 투자회사는 금융감독원 공시 대상은 아니지만 금융투자협회 회원으로 공시를 하고 있다. 이들은 평균 80~90%에 달하는 배당성향(당기순이익에 대한 배당액 비율)을 보이고 있다. 크레디스트위스 서울지점은 지난달 30일 지난해 이익잉여금 920억원의 97.8%인 900억원을 본사로 보내기로 했다. 골드만삭스 서울지점은 지난해 이익잉여금 604억3,300만원 중 600억원(99.3%)을, 프랑스 투자은행인 비엔피파리바증권 서울지점은 배당성향 90%인 41억7,142억원을 결산배당금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이익 내에서 이뤄지는 배당은 합법’이라는 점을 이용해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회계 업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과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등으로 기업의 회계 투명성에 대한 필요성과 관심이 매우 높은 상황인데 관련 법안 마련이 대선 때문에 늦춰져서는 안 된다”며 “유한회사의 감사 대상 포함은 다소 느슨한 중소기업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는 측면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