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분노의 포도… 박해 & 대박



‘계층 간의 반감을 조장해 폭동을 선동하는 공산주의 소설’, ‘미국의 전통적인 3대 사상이 녹아 있는 빼어난 작품’. 1939년 4월14일, 초판이 나온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 대한 엇갈린 평가다. 먼저 극찬한 쪽을 보자. ‘미국의 전통적인 3대 사상’이 무엇인가. 시인 랄프 에머슨의 신비적 초월주의, 역시 시인인 월트 휘트먼의 대중 민주주의, 윌리엄 제임스·존 듀이의 실용철학을 말한다. 문학과 철학의 역사가 길지 않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와 철학자들의 생각을 작품 하나에 담았다니 이만한 칭찬도 없다. 문학 비평가들이 주로 이런 찬사를 보냈다.


반면 보수적이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사회 질서를 무너뜨릴 불온 서적’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캔자스시 교육위원회는 산하 도서관에 책의 비치를 금지하고 보관 중이라면 태워 없애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분서(焚書) 소식을 접한 농장주들은 캘리포니아 주의회에 ‘분노의 포도’를 금서로 지정해달라는 청원까지 넣었다. 왜 그랬을까. 고향 땅을 잃고 캘리포니아의 농장에 날품팔이로 일하는 유랑 농민들의 비참한 삶과 거대 농장주들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옮겼기 때문이다.

부유층의 반발이 오히려 독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한 푼이라도 지출을 아끼려던 대공황기에 대중은 이 책을 샀다. 책이 출간된 1939년에는 3년째 판매 1위를 지켜온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치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듬해에도 43만권이 팔렸다.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1,700만부 이상 나갔다. 저자인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당시 37세)은 돈 방석에 앉고 각종 상을 휩쓸었다. 1940년 소설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전미 최고도서상을 받았다. 1962년 노벨문학상을 받는 데에도 이 책의 영향을 컸다.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를 쓰기 된 계기는 취재 의뢰*. 당시 캘리포니아는 일자리를 찾아 유입되는 중부지대 출신 농민들로 골머리를 앓았다. 캘리포니아주에 1930년부터 1950년까지 유입된 인구가 약 400만명. 기존 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알력이 심해지고 일부 농장의 비인간적 착취가 사회 문제로 부각되자 ‘샌프란시스코 뉴스’는 스타인벡에게 현장 취재를 맡겼다.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이주민들의 어려움과 좌절을 취재하라는 의뢰를 받은 스테인벡은 밤 낮으로 현장을 찾고 유랑 농부들과 만났다. 약 1여 년의 취재를 마친 스타인벡은 취재수첩의 내용을 기반으로 ‘분노의 포도’를 썼다.

소설의 내용을 살펴보자. 자기 땅을 일구고 소출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농민들이 유랑 길에 오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재앙. 대공황과 더스트 볼(Dust Bowl) 탓이다. 직역하면 ‘먼지 그릇’이라는 뜻의 더스트 볼은 1932년부터 약 5년간 미국 중서부의 광활한 평원을 휩쓸었던 사막화 현상과 먼지 폭풍을 뜻한다. ‘씨를 뿌리고 한없이 나아가 돌아오면서 추수한다’던 대평원이 ‘죽음의 땅’으로 변한 이유는 식량증산을 위한 인간의 탐욕과 가뭄. 영농기계화 바람 속에 1차 대전으로 일손이 부족해지자 대거 도입된 ‘들창코 괴물(트랙터)’은 야생 풀을 뿌리째 갈아엎었다. 처음에는 소출이 늘어났지만 땅은 곧 지력을 잃고 사막과 먼지 구덩이로 변해갔다.


농지가 알곡을 잉태하지 못하는 와중에서도 농민들의 빚은 점점 불었다. 1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정부가 식량 증산을 위해 정부의 권고대로 은행 대출을 받아 트랙터 같은 농기계를 구입했던 농가들이 특히 타격받았다. 빚이 순식간에 두 배로 늘어난 반면 생산량은 격감해 대출을 갚을 길이 없었다. 결국 땅과 집이 은행으로 넘어갔다. 버티면 은행이 동원한 트랙터가 집을 부쉈다. 오클라호마에서 3대가 70년 동안 개간한 농지에서 터 잡고 살던 조드(Joed) 일가도 이렇게 집을 잃었다. 재산을 탈탈 털어 이들이 장만한 것은 낡디 낡은 중고 트럭. 일자리가 차고 넘치고 싱싱한 오렌지와 포도가 기다린다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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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트럭에 12명이 타고 3,200㎞ 떨어진 캘리포니아행은 쉽지 않았다. 도착하기도 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길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약한 맏아들은 일찌감치 도망쳤다. 나이 어린 사위도 임신한 아내를 놔두고 달아났다. 집안 어른들도 제구실을 못했다. 강건했던 아버지는 고향을 떠난 뒤부터 자주 흔들렸다. 고생 끝에 도착한 캘리포니아도 기대와 딴판. 못 살겠다며 고향을 등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일자리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반면 농장주들은 신이 났다. 인력이 밀려 들어오며 인건비가 나날이 떨어졌으니까.

날품 팔이 노동자들이 단합할 기세라도 보이면 사람을 해고하고 깡패를 불렀다. 노동자들의 리더가 알게 모르게 살해 당하는 일도 많았다. 고난의 와중에서도 둘째 아들 톰은 현실에 서서히 눈을 떴다. ‘아무리 기도해도 대답은 없었다’며 노동자들의 연대 만이 사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괴짜 목사에게 크게 영향받았다. 가족들은 톰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끝까지 조드네 식구들을 괴롭혔다. 노동자들에게 단합하자고 촉구하던 전직 목사도 일자리를 잃을까 우려하던 다른 노동자들의 손에 죽었다. 톰 역시 사라졌다. 괴짜 목사의 사인을 규명하려다 방해하는 사람과 싸워 사고를 내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거센 비가 내리던 날 어린 임산부인 큰 딸은 죽은 아이를 낳았다. 슬픔에 잠길 여유도 없이 강물이 범람해 남은 가족들은 헛간으로 피하며 소설은 마지막으로 치닫는다. 고향 오클라호마에서 그토록 바라던 비는 세상을 삼킬 듯 내리고, 가족들은 절망에 빠져든다. 큰 비가 내려 당분간 일자리가 없어 길고 긴 굶주림이 뻔하기 때문이다. 절망의 순간에서 사라졌던 둘째 톰은 노동자들의 방패가 되겠다고 맹세한다. 비를 피하는 움막 안에는 또 다른 절망이 있다. 한 중년 남성이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던 것. 아기를 막 사산한 큰 딸은 중년 남성의 머리를 안고 부푼 젖을 물린다. 진저리치는 절망으로 가득했던 ‘분노의 포도’는 이 장면으로 끝난다.

‘분노의 포도’가 단순한 르포성 고발 소설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희망을 남겼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뒤늦은 자각과 연대가 시작된다는 암시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 죽은 아이를 낳아 기력을 잃고 슬픔에 잠긴 어린 산모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젖을 주는 행위야말로 절망 속 휴머니즘의 정수다. 스타인벡은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을 찬미하고 그 연대 가능성을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장면을 썼으리라. 굶주리고 지친 자가 굶주려 죽어가는 자와 나누는 모유보다 강한 생명의 유대가 또 있을까.

소설 ‘분노의 포도’는 흑백영화로도 제작돼 성공을 거뒀다.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로 사회를 바꾸는 성과도 거뒀다. 소설이 주목받으며 고향을 등지고 농노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이주 농민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분노의 포도’ 발간 1년 뒤, 하원은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각종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책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은 어찌 됐을까. 미국에서는 다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빨갱이 소설’이라는 색안경도 사라진지 오래다. 10대들이 읽어야 할 교양서적으로 자리 잡았다. 캘리포니아 주는 ‘분노의 포도 읽기 행사’를 정기적으로 펼친다.

명작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다. ‘분노의 포도’는 무겁게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 같다. 초판 출간 78년이 지났어도 스타인벡이 제기한 문제와 분노는 풀리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99%’라던 월가 점령시위대에서, 수많은 ‘개·돼지’가 모였던 촛불에서 ‘분노의 포도’를 본다. “사람들의 눈에는 낭패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서린다.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의 포도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분노가 충만하고 그 포도 수확기를 위하여 알알이 더욱 무겁게 영글어간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존 스타인벡은 작가 이전에 신문기자였다. 길지 않았으나 뉴욕 ‘아메리칸’ 신문사의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기자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각종 직업을 전전했어도 소설가로 명성을 얻은 뒤에는 다시 기자로 일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특파원으로 북아프리카, 남 이탈리아에서 전쟁 기사를 보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뒤에도 월남에 기자 신분으로 달려갔다. 1964년 ‘자유를 위한 신문기자상’도 받았다. 스타인벡은 찰스 디킨스, 마크 트웨인, 잭 런던과 조지 오웰,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 영미권 기자 출신 문필가의 명맥을 이었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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