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상법 개정안 등 새 정부의 재벌개혁이 단행되면 투자할 기업의 자원이 경영권 방어 등 비생산적인 부분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기업 지주사 임원) “현 제도로도 충분히 새 정부가 원하는 개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전보다 더 강하고 새로운 규제를 만들겠다는 것은 정치권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로밖에는 읽히지 않습니다.” (5대 그룹 임원)
새 정부가 강력한 ‘재벌개혁’을 추진할 뜻을 밝히면서 재계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상법 개정안을 비롯한 재벌개혁과 관련한 법·제도가 현실화되면 이는 바로 ‘규제 폭탄’으로 되돌아와 기업의 경영활동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기업 관련 공약은 재벌개혁으로 귀결된다. 후보 시절에 발표한 10대 공약 가운데 재벌개혁은 세 번째로 언급됐으며 관련 정책만도 30여건에 달한다. 특히 지난 10일 발표한 문 대통령의 취임사에서는 재벌이 개혁 대상임을 분명히 명시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이 재벌개혁과 관련해 가장 전면에 내세우는 공약이 바로 ‘을지로위원회(을을 지키는 위원회) 신설’과 ‘상법 개정’이다. 위원회는 검찰과 경찰·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감사원 등을 중심으로 범정부 기관을 만들어 납품단가 후려치기 같은 재벌의 갑질 횡포에 대한 조사와 수사를 강화하고 엄벌하겠다는 포석이다. 이는 문 대통령의 또 다른 공약인 공정위의 조사국 부활 및 전속고발권 폐지 등과 맞물려 정치권의 대기업에 대한 조사 권한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국회에서 계류된 상법 개정안은 대기업 규제를 목적으로 한 ‘종합규제세트’와 같다. 모기업 주주가 자회사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다중대표소송제는 물론 이사진 선임 시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집중투표제, 독립 지위의 감사위원을 별도로 선임하는 감사위원 분리선출, 주총 참석 없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전자투표제 의무화 등이 상법 개정안에 담겨 있다. 상법 개정안은 이미 대선 전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바른정당이 합의를 한 만큼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지주회사 전환을 목적으로 한 계열사의 인적분할 시 자사주 의결권을 제한하거나 공정거래법상 상장 자회사 최소지분율 요건을 30%로 지금보다 10%포인트 올리는 것 역시 기업으로서는 부담이다.
당연히 재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원죄’를 지은 대기업이라는 부담감에 적극 대응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정치권의 재벌개혁안이 모두 현실화되면 정상적인 기업 경영이 불가능해지고 기업 부담만 가중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예컨대 SK그룹의 경우 지주회사인 SK㈜가 보유한 SK텔레콤 지분이 25.22%인데 자회사 최소지분율 요건을 30%로 올릴 경우 4.78%(약 386만주)의 추가 지분 확보가 필요하다. SK텔레콤의 최근 주가가 23만6,000원(12일 종가 기준)임을 고려하면 이를 확보하는 데만도 9,100억원 이상이 필요한 셈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지주회사 전환은 정부가 투명경영을 위해 기업에 요구한 정책인데 자회사 최소지분율 요건 강화나 자사주 의결권 제한 등의 기준이 강화될 경우 사실상 지주사 전환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며 “투자에 사용돼야 할 기업의 자금이 경영권 확보에 쓰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집중투표제가 도입될 경우 글로벌 투기자본이 마음만 먹으면 이사회의 절반가량을 투기자본의 몫으로 내어줄 수밖에 없으며 전자투표제 역시 투기자본이 소액주주들을 앞세워 악용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새 정부의 재벌개혁은 기존 법과 제도를 충실히 적용하되 필요하다면 단계적으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등 속도조절이 요구된다고 입을 모은다. 10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오너 중심의 경영이나 지주사 전환 등은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고 단언할 수 없는 문제로, 기업의 자율성을 보장해줘야 하는 부분”이라며 “대기업의 갑질 등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하고 이후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논의를 통해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