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쓸 것 같은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무드등, 작고 귀엽고 예쁜 것들...’
정선민(22)씨가 최근 홀린 듯 사온 물건들이다. 언젠가 쓸 것 같아 샀지만 딱히 사용한 적은 없다. 그렇다고 구매를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짝에도 쓸모는 없지만 예뻐서 사야 했던 ‘예쁜 쓰레기’이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디자인이나 제품 특유의 감성만으로도 그에겐 충분한 구매 이유가 된다. ‘예쁜 쓰레기는 예쁨으로 자신의 쓸모를 다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차증현(25)씨는 한 달에 3만원씩은 인기 만화의 피규어를 구매하는 데 사용한다. 생활비 중 월세와 공과금을 제하면 45만 원 가량 남는 그에게 3만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러나 돈이 아까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핏줄까지 섬세하게 묘사된 피규어를 방 한편에 전시하면 드는 행복감 때문이란다. 차씨는 그런 물건이라면 쓸 일이 없더라도 살 수 있다고 했다.
“카페는 커피가 아니라 감성을 마시러 가는 곳이다.” ‘카페덕후’ 김정현(23) 씨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김씨에겐 인테리어, 분위기, 선곡 등이 카페 선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그는 “카페라는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을 사랑한다”고 강조했다. 통장에 6,000원이 남아있던 때 즐겨 찾는 카페에서 5,000원 짜리 커피를 마시고 1,000원 짜리 라면으로 식사를 때운 경험도 있다.
◇‘감성값’으로 ‘예쁜 쓰레기’ 구매한다
실용성이 떨어져도 감성을 충족시켜주면 지갑을 여는 청년이 늘고 있다. ‘감성값(감성을 구매하는 데 쓰는 비용)’ ‘예쁜 쓰레기’ 등의 용어는 이런 경향을 대변한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 ‘감성값’ ‘예쁜 쓰레기’ 등을 검색하면 구입 품목을 자랑하는 게시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쁜 쓰레기’에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은 1만 5,000 여 개에 달한다. 한 유저는 “내 통장을 텅장(텅텅 빈 통장)으로 만든 애긔들 ㅎ 예쁜 게 최고야 짜릿해 늘 새로워” 라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 유튜버의 ‘천하제일 예쁜 쓰레기 선발대회’ 영상은 32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영상엔 빨대 안경, 금관, 꽃 머리띠 등 실용성 제로의 예쁜 물건이 등장한다. “어 왜 저런 것들이 우리 집에 있지?” “왓... 빨대 안경 좋아요!! 어디서 샀습니까!!!” 댓글 창은 그의 ‘쓰레기’를 부러워하거나 구매정보를 묻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디자인, 감성에 집중...청년 취향저격 마케팅
기업들도 이러한 소비 트렌드를 발 빠르게 반영해 디자인, 감성에 충실한 전략으로 청년들을 공략 중이다.
롯데시네마는 지난 2일 ‘카카오프렌즈 팝콘통 콤보’를 출시했다. 팝콘통은 ‘어피치’와 ‘라이언’ 캐릭터 모양이다. 라지 사이즈 팝콘 1개, 미디엄 사이즈 음료 2개, 캐릭터 팝콘통으로 구성되는 이 콤보의 가격은 2만 5,500원. 일반 콤보가 6,000원에서 1만원 사이인 것을 고려하면 무시할 수 없는 차이다. 그럼에도 해당 제품은 SNS 상에서 화제를 모으며 인기를 끌고 있다. 구입 인증 사진이 줄지어 올라오고 품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감성마케팅의 원조 격인 스타벅스는 이번 여름을 맞아 24종의 신규 MD(Merchandising) 제품을 내놨다. 지난봄 출시한 ‘체리블라썸 MD’에 이어서다. 체리블라썸 MD 제품 중 하나는 출시 당일 품절되기도 했다. 출시와 동시에 구입하려 매장을 찾는 열성적인 고객들이 매 시즌 등장하기도 한다. 이 외에 특유의 통유리 건물, 전략적으로 배치된 벽화, 전용 음반 등은 스타벅스에 감성을 더하는 요인이다. ‘스타벅스 감성마케팅’의 저자 김영한은 “스타벅스는 이제 커피만 아니라 감성까지 같이 파는 매장으로 인식된다.”고 말한다.
출판업계는 감각적인 표지 디자인으로 젊은층의 눈길을 사로잡는 전략을 택했다. 교보문고의 리커버 북이 완판을 이어가면서 리커버 에디션은 출판업계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알라딘은 지난달 한강의 ‘여수의 사랑’을 새로운 표지로 다시 출간하기도 했다. 작년엔 소와다리 출판사가 복간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매진되는 등 초판본 열풍이 불기도 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판본을 구입한 정지형(24) 씨는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닌데 예쁘게 나와 사고 싶었다”고 말했다.
◇팍팍한 현실 속 ‘가난한 사치’... 청년들의 우울한 자화상
‘예쁜 쓰레기’를 찾고 ‘감성값’을 지불하는 청년의 모습은 사회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피규어 마니아’ 차씨는 “불투명한 미래에 투자하기보단 지금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에겐 더 가치 있는 행위”라고 말했다. ‘카페덕후’ 김씨는 “사치를 부리고 싶어도 쿨하게 돈을 쓸 수 없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싶은 것들을 종종 사면서 스스로 위안한다.”라고 털어놨다. 그는 “가뜩이나 없는 돈 쪼개고 쪼개 쓰는데, 그것마저 실용적인 부분에만 맞춰지면 인생이 너무 불행하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불신과 팍팍한 현실을 반영한 소비 트렌드인 셈이다.
이재흔 대학내일 20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경기침체, 취업난에 치이는 지금의 청년에게 미래는 나아질 가망이 없고 불안정한 것으로 인식된다. 이 때문에 이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돈을 아끼기보단 오늘의 행복에 돈을 쓰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청년세대의 미래인식, 가치관 변화로 일종의 ‘가난한 사치’로서의 소비가 나타난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민제 인턴기자 summerbreez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