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위대한 사회'와 그 적들






1964년 5월 22일, 미국 미시간대학교 졸업식. 특별 참석한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연설을 듣기 위해 8만여 관중이 숨을 죽였다. ‘우리에게는 가난과 인종차별을 끝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미국은 부유한 사회와 강대한 사회를 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위대한 사회를 향한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위대한 사회를 건설합시다.’ ‘위대한 사회’가 존슨 대통령의 캐치프레이즈가 된 순간이다.* 암살 당한 전임 케네디 대통령이 주창한 ‘뉴 프런티어’의 이름만 바꿨다는 지적도 없지 않았지만 존슨은 구상을 하나씩 실현해나갔다.

‘위대한 사회’는 실로 방대한 내용을 담았다. ①노인에 대한 의료 지원(메디케어)과 ②젊은이에게 교육 지원 대폭 확대 ③기업인에게 세금 환불** ④노동자에게 최저 임금 인상 ⑤농민에게 보조금 지급 ⑥직업 훈련 확대 ⑦빈민에게 식량 지원 ⑧무주택자에게 주택 공급 확대 ⑨흑인에 대한 법률 구조와 민권 향상 ⑩인디언 학교 지원 ⑪불구자 재활 ⑫실업자 수당 증가 등등이다. 존슨은 계속되는 연설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제국을 건설하거나 영토를 넓힌 대통령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대신 어린이를 교육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배고픈 사람이 먹도록 돕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길을 찾게 하며, 모든 사람이 투표를 할 수 있게 만든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존슨이 ‘위대한 사회’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던 현실적인 이유도 많았다. 무엇보다 불균형이 심했다. 대학에 가고 싶어도 경제력이 없어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이 매년 10만 명에 이르렀다. 인종 차별의 해악도 심했다. 20세기 중후반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들의 대다수가 투표권조차 행사하지 못했다. 가만 놔두면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의 폭동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 존슨 대통령은 인종 차별 해소를 통한 사회적 불만 폭발 가능성 해소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가 1964년 7월 발효된 민권법. 인종차별을 금지한 민권법은 흑백 평등운동의 바이블로 꼽힐 만큼 유색인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케네디의 잔여 임기를 물려받았던 존슨은 1964년 대통령 선거(11월 3일)에서 ‘위대한 사회’라는 구호를 제대로 활용하며 역대 최대 표차로 공화당의 베리 골드워터 후보를 눌렀다. 대선과 동시에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도 민주당은 공화당에게 압승을 거뒀다. 하원 의석 295석 대 140석, 상원은 68석 대 32석. 상·하원을 통틀어 두 배 이상의 의석을 얻을 만큼 ‘위대한 사회’는 표심을 흔들고 존슨의 입지를 탄탄하게 굳혔다.

존슨은 임기 중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 열성적으로 입법활동을 벌였다. 1965년부터 2년간 의회를 통과한 복지 관련 법안만 90여 개.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존슨은 여야 가리지 않고 의원들을 만났다. 백악관에서 1 대 1로 만나 설득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흑백 차별 해소와 교육에 대한 투자 확대, 지역 사회 자립 지원을 골자로 했던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은 노인 의료나 빈곤층 지원, 이민법 분야까지 확대했다. 한국인들이 대거 미국에 정착한 것도 위대한 사회 모토 속에서 개정된 이민법 덕분이다.

위대한 사회는 성공했을까. 평가가 엇갈린다. 우선 빈곤층이 줄어들었다. 각종 정책이 실행되기 시작한 1965년 3,300만 명에 이르던 빈민이 2,500만 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중 연방 정부가 교육과 사회보장·보건 등 사회복지 목적에 지출한 예산은 2배 이상 늘었다. 목표했던 완전한 빈곤 퇴치는 아니어도 효과가 나타났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빈곤이 감소한 이유에 대해서는 상반된 해석이 존재한다. 어디까지가 ‘빈곤에 대한 전쟁’의 공로이고 어느 정도가 전반적인 경제성장의 덕분인지도 가려내기 어렵다.

‘위대한 사회’를 향한 복지 지출이 말로만 요란했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의 복지 예산 지출이 워낙 작아 급증한 것처럼 보였어도 유럽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투입된 막대한 전쟁 비용이 재정을 짓눌렀다. 1965년에서 1973년까지 복지비는 155억 달러인 반면 베트남 전쟁에는 1,680억 달러가 넘는 돈이 들어갔다. 존슨 자신도 임기 중반 이후부터는 ‘위대한 사회’보다는 베트남 전쟁에 신경을 기울였다. 존슨이 베트남 전쟁에서 북폭(北爆) 확대를 결정(1965년 2월)한 이후 3년 반 동안 북베트남에서 쏟아부은 폭탄은 약 64만 3,000t. 한국전(46만 t)보다 많은 폭탄을 투하하며 존슨의 관심사도 온통 전쟁에 쏠렸다.


‘위대한 사회’ 추진을 둘러싼 시민 사회와 공무원 집단의 주도권 다툼도 존슨을 질리게 만들었다. 존슨은 ‘총(전쟁)과 버터(복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베트남 전쟁에는 돈이 끝없이 들어갔다. 불필요한 전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징병 거부와 반전 운동도 고개를 들었다. 기대와 달리 베트남 전쟁은 미국을 수렁에 빠지게 만들었고 존슨의 인기도 떨어졌다. 결국 존슨은 1968년 재선 불출마를 선언할 만큼 입지 약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사회를 향한 꿈이 전쟁에 발목을 잡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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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대통령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한국과 미국 간 양국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 바로 존슨 대통령 재임 기간으로 꼽힌다. 존슨 입장에서는 월남전 참전 규모를 늘리는 한국을 각별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1966년 10월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온 나라가 환영행사에 동원됐다. 월요일이 임시 공휴일로 잡히고 학생, 공무원 동원령 속에 275만 명의 환영 인파가 서울에서 존슨 대통령을 맞았다고 한다. 서울 인구가 350만 명이던 시절, 이런 환대를 받은 존슨 대통령은 ‘인생 최고의 날’로 기억했다고 전해진다.

존슨이 성공한 대통령인지 아닌지, 위대한 사회가 성공했는지 아닌지 논란 가운데 확실한 게 세 가지 있다. 첫째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 존슨의 정책을 허물어 온 결과 빈부 격차, 양극화 현상이 심해졌다는 사실이다. 월가 점령 시위 등이 괜히 일어나는 게 아니다. 한국의 보수적 경제학자들 역시 ‘복지 정책’을 공박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위대한 사회의 실패’ 사례를 든다. 두 번째는 존슨의 장담대로 ‘총(전쟁)과 버터(복지)’를 동시에 충족시키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예산의 방만한 집행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세 번째, 존슨 대통령의 성공 여부에는 논란이 있어도 어떤 대통령보다 야당과 대화했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존슨은 압도적인 의석 수 우위 갖고도 개혁을 완성하지 못했다. 중간 선거부터는 상하원의 의석 수도 조금씩 빼앗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존슨이 재평가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대에는 성공하지 못했어도 존슨은 미국 사회의 기반을 닦았다. 미국이 인종 차별과 빈부 격차 등의 사회적 갈등을 그나마 극복하고 오늘날에 이를 수 있는 바탕에는 존슨 대통령 같은 정치인들의 부단한 대화 노력이 깔려 있다.

존슨 대통령이 ‘위대한 사회’를 주창한지 53주년. 위대한 사회는 과연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원로 언론인인 남재희 전 교통부 장관의 한 기고(실패한 존슨의 ‘위대한 사회’의 교훈·2015년 1월 15일 자 한겨레신문 특별기고)에 눈길을 잡아 끄는 대목이 나온다. ‘사회 입법이 되려면 직접 수혜자들보다 더욱 광범한 지지층이 있어야 한다. 정치적 개혁이 가능하려면 보다 많은 공공 대중이 사회적 개입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무엇을 극복해야 할까. 노무현 대통령 시절, ‘종부세 때문에 못 살겠다고 분개하는 달동네 주민’이 적지 않았다. 요즘이라고 얼마나 다를지 모르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존슨 대통령이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를 처음 거론한 것은 미시간대 졸업식보다 보름 전인 1964년 5월 7일 오하이오대 졸업식. 존슨은 교육 문제를 강조하며 위대한 사회의 운을 떼고 미시간대 졸업식에서 보다 구체적인 구상을 내놓았다. 서구 사회에서 ‘위대한 사회’라는 용어는 오래전부터 사용돼 왔다. 이주영 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연구논문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와 미국 자유주의(1986)”에 따르면 1381년 영국에서 발생한 와트 테일러의 농민 반란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쓰였다. 농민과 성문을 열어준 런던의 기능공들이 ‘위대한 사회’라는 이름을 걸고 봉건 체제에 저항했다.

두 번째 사용자는 애덤 스미스. 1776년 국부론에서 이 용어를 썼다. 스미스에게 ‘위대한 사회’란 국제무역의 연대에 의해 형성된 세계경제공동체를 의미했다. 이어 페비언주의자인 그래험 왈라스가 1914년 ‘위대한 사회’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왈라스는 위대한 사회를 애덤 스미스와 같은 뜻으로 봤다. 존슨 대통령은 참모들이 제시한 ‘좋은 사회(the Good Society)’와 ‘위대한 사회’ 중에서 후자를 골랐다고 전해진다.

** 법인세를 내려줬다. 당시 미국 기업의 법인세는 최고 52% 선. 존슨은 최고세율은 48%로 내리고 면세 규정도 늘렸다. 아울러 개인 소득세도 낮췄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을 맞아 가용 자금 총동원을 위해 최고 91%까지 잡았던 소득세율을 70%로 내렸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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