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피고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듯 박근혜 전 대통령은 법정에 입장하라는 재판장의 부름을 듣고서도 잠시 뜸을 들였다. 서울구치소에 들어가던 지난 3월31일처럼 남색 정장과 검은색 셔츠를 입었다. 약간 부스스했지만 플라스틱 머리 집게를 사용해 특유의 올림머리도 지켰다. 양손의 결박과 수형자 번호 ‘503’이 적힌 배지만이 그가 미결수라는 현실을 보여줬다.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박 전 대통령은 “무직입니다”라고 답했다.
박 전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뇌물 혐의를 다루는 첫번째 정식 재판이 23일 오전10시부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 심리로 대법정 417호에서 열렸다. 박 전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에 이어 공개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는 헌정사상 세 번째 전직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3시간 남짓한 재판 내내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 박 전 대통령은 18개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박 전 대통령 변호인 유영하 변호사는 미르·K스포츠재단을 통한 뇌물 강요에 대해 “검찰은 기업들이 700억원 넘는 돈을 재단에 출연하게 한 뒤 사업을 수주하려고 플레이그라운드와 더블루K를 만들었다는데 조그만 회사들이 대통령 임기 내에 그 돈을 다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며 “박 전 대통령은 범행 동기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 전 대통령은 최씨와 경제 공동체가 아니라면서 “두 사람이 공모했다고 하지만 공소장 어디에도 구체적인 공모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박 전 대통령 측은 기업 청탁을 들어주고 뇌물을 받았다는 논리도 부정했다. 유 변호사는 롯데가 면세점 면허를 얻는 대가로 75억원을 K스포츠재단에 내기로 했다는 검찰 주장에 “박 전 대통령은 면세점을 늘리는 게 맞는지 재차 확인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있다”고 말했다. 또 CJ헬로비전 합병을 추진하던 SK에 뇌물을 요구했다는 혐의에도 “오히려 대통령은 CJ헬로비전 합병을 부정적으로 봤다는 내용이 기록에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박 전 대통령은 문화계 지원 배제 사안을 보고받지 않았다”면서 “문화체육관광부 1급 공무원 사표를 받으라고 지시한 일도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헌법재판소가 박 전 대통령을 파면한 핵심 요인인 청와대 문건 유출에 대해서도 유 변호사는 “최씨에게 연설 관련 의견을 물었을 뿐 고위직 인사 자료 등을 전달하라고 지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도 직접 “변호인의 의견과 같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이경재 변호사를 사이에 두고 박 전 대통령과 나란히 앉은 최씨는 울먹였다. 그는 “40여년 알고 지낸 박 전 대통령이 나오게 한 제가 죄인인 것 같다”며 “박 전 대통령은 뇌물이나 이런 범죄를 했다고 보지 않는다. 검찰이 몰고 가는 형태라고 생각한다”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이 재판이 정말 진정으로 박 전 대통령의 허물을 벗겨주고 나라를 위해 살아온 대통령으로 남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 전 대통령은 재판 내내 최씨를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날 최씨와 재판을 따로 받게 해달라는 박 전 대통령 측 요청을 거부하고 오는 29일부터 재판을 병합하기로 했다.
이날 대법정은 방청객들로 만원을 이뤘다. 친박 단체인 ‘대통령 탄핵무효 국민저항 총궐기 운동본부(국민저항본부)’를 비롯한 보수단체 회원 1,000여명(주최 측 추산)도 법원 인근에서 박 전 대통령의 석방을 외쳤다.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는 법원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이종혁·박우인기자 2juzs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