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8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에서 소속 정당인 기독교민주연합의 선거 유세에서 연설한 뒤 맥주잔을 들어올리고 있다. 이날 메르켈 총리는 유럽인들은 우리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챙겨야 한다고 강조해 향후 유럽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의 새 판이 짜질지 관심이 쏠릴 전망이다. /뮌헨=EPA연합뉴스유럽의 맏형 격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제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난 것 같다”며 유럽이 더 이상 미국과 영국 등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폭탄선언’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미국이 수립한 국제질서에 따라온 유럽이 독자생존 노선으로 전환하겠다는 메시지이자 독일이 주도하는 ‘강한 유럽’의 신호탄으로도 받아들여지는 강경 발언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및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고집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 대한 메르켈 총리의 깊은 실망감이 향후 국제질서에 어떤 지각변동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28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은 이날 독일 뮌헨에서 소속 정당 기독교민주연합의 선거 유세에 참석한 메르켈 총리가 “지난 며칠간의 경험으로 볼 때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며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유럽인들은 우리의 운명을 분명하게 자신의 손으로 챙겨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는 미국이나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외신들은 이날 발언이 앞서 나토와 G7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기후변화협약 이행 등 국제공조가 필요한 이슈에 대해 사사건건 비협조적인 태도와 거친 언행을 보인 데 대한 반감을 나타낸 것이라고 풀이했다. 영국 가디언은 “메르켈 총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이 구축해온 국제질서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와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훼손됐다고 보고 새로운 서구연합을 제안한 것”이라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차 대전 패전국으로서 반세기 이상 미국에 저자세를 보여온 독일이 트럼프 대통령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실망하며 국제질서의 ‘새 판 짜기’에 나섰다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나토의 초대 사무총장을 인용해 “과거 나토의 전략은 러시아를 고립시키고 미국을 더욱 끌어들이며 독일의 역할을 줄이는 것이었다”면서 “메르켈의 이번 발언은 지난 70년간보다 독일과 유럽이 더 근본적이고 독립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전했다.
메르켈 총리가 구상하는 ‘강한 유럽연합(EU)’의 파트너로는 프랑스가 부상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프랑스 주간지 주르날 뒤 디망슈와의 인터뷰 도중 앞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대면에서 이슈가 된 ‘강렬한 악수’에 대해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고 진실의 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은 25일 벨기에 브뤼셀 미국대사관에서의 첫 대면에서 손을 강하게 맞잡고 긴 시간 악수를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악수를 마치고 손을 빼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손가락 관절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강한 악수를 6초가량 이어가 화제를 모았다. 마크롱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이날 악수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하면서도 “비록 상징적인 일일지라도 작은 양보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고 말해 앞으로 프랑스가 미국에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트럼프 미 행정부와의 미묘한 관계 변화를 선포한 가운데 WP는 대서양 연안국가 가운데 영국이 EU에서 빠지면서 독일과 프랑스 간 연대가 더욱 공고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메르켈 총리가 강력한 유럽 질서 구축을 원하더라도 난민 문제나 남유럽 국가의 긴축재정 반발 등 난제를 해결해야 유럽의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WP는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