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종영한 MBC ‘역적’은 허균의 소설 속 도인 홍길동이 아닌 1500년대 연산군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 홍길동을 재조명한 드라마. 폭력의 시대를 살아낸 인간 홍길동의 삶과 사랑, 투쟁의 역사를 다뤘다. 이하늬는 극 중 연산의 후궁인 숙용 장씨 역을 맡았다. 왕의 여인이자 예인으로서의 삶을 능숙하게 줄타기하며 호평 받았다.
이하늬가 서울대에서 국악을 전공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덕분에 기생 역을 여러 번 제안 받기도 했다. 이하늬는 앞서 제작발표회에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패였기에 아껴왔다”며 “뭔가 달라도 다른 장녹수를 보여드리겠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스스로 돌아본 녹수는 만족스러웠을까. 이하늬는 ‘반반’이라고 대답했다.
“어떤 부분은 ‘이 정도면 나에게 선물같이 남겠다’는 생각이 들고, 어떤 부분은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제가 누를 끼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빈 부분도 있고,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있는 덕분에 차기작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승무를 추는 장면이 특히 만족스러웠다. 다시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연일 밤샘이 이어지던 와중에도 녹수의 승무를 완벽하게 그려내기 위해 5시간이나 촬영했다. 아끼고 아꼈던 승무를 공개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이하늬는 제작진들의 열정과 디테일함 속에서 연기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회상했다.
“작년에 ‘판스틸러-국악의 역습’이라는 프로그램을 했어요. 국악이 대중화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임했죠. 김진만 감독님과 첫 미팅을 할 때가 기억나요. 저는 ‘판스틸러’ 때문에 12월까지는 아무 것도 못 한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그렇게 예인으로 살고 있다가 1월부터 열심히 촬영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장녹수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사료 자체는 많지 않다. 실제와 다른 기록이 있기도 하다. 녹수를 표현하기에 앞서, 진위여부를 판가름하는 것부터 힘든 작업이었다. 이하늬는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이었다고 회상했다. 황지영 작가는 사학과 출신이고 김진만 연출은 역사를 부전공했다. 역사관이 튼튼한 두 사람 덕에 실제 사료를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마이너 관점에서 보는 것이 가능했다. ‘역적’이 역사를 뒤틀지 않으면서도 재해석할 수 있던 이유다.
“당시 관기 출신의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양반집 사대부여자들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그런 여자가 ‘이 거지같은 세상, 맞짱 한 번 떠볼래’라고 한 거예요. 진만 감독님은 그런 녹수에게 여성혁명가라는 거창한 이름도 붙여주셨어요. 그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아티스트적인 성향이 강하고 진취적인 여성이 조선시대에 산다는 건 형벌과도 같았겠죠. 녹수를 이해하기 위해 계속 대화하면서 접합 지점을 찾아나갔습니다.”
첫 미팅 때, 김진만 연출과 이하늬는 이미 녹수의 최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녹수는 마지막에 돌을 맞아 죽는 인물.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하늬의 머릿속에 ‘흥타령’이 떠올랐다. 녹수의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이 난다며 즉석에서 노래를 불렀고, 김 연출도 흡족해했다. 최종회에서 녹수의 심정과 상황은 ‘흥타령’을 통해 전달됐다. 이루 설명할 수 없는 녹수의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녹수의 마음에 많이 공감했어요. 제 영혼의 끝자락에 있는, 정수의 것을 하고 있는데 무참히 밟히는 상황이 있어요. 녹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직업적인 면 때문에 그런 상황을 겪게 되죠. 겉모습에만 신경을 쓰고 그게 다인 것처럼 표현될 때 말이에요. 예인으로서, 배우로서 내 감성은 궁금하지 않고 겉모습만 궁금한가? 하는 생각이 들죠.”
녹수를 연기했다는 것 말고도, ‘역적’이라는 작품이 이하늬에게 남긴 것이 있다. 드라마가 시청률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일. 그런데 ‘역적’은 가능했다. 퀄리티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힘을 쏟았다. 현장의 막내 스태프가 대사 숙지를 다 하고 들어올 정도였다. 단 하나의 이유, 배우들의 연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하늬는 마지막으로 ‘역적’이 남긴 소중한 가치를 강조했다.
“그런 현장에서 제가 어떻게 허투루 연기할 수 있을까요. 이게 바로 민중의 승리라고 생각해요. 배우뿐만 아니라 막내까지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든 거잖아요. 무명배우 분을 과감하게 엔딩에 넣으신 것도 저에게는 정말 감동이었어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었죠. 시청률을 넘어서는 만족감을 느낀 작품이었습니다.”
/서경스타 양지연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