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산업은 ‘종합 서비스’ 산업의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항공사 임직원들은 여느 업종 종사자들보다 소통 및 협력 능력, 서비스 정신 등이 더욱 요구된다. 한국 대표 항공사인 대한항공의 인재양성 시스템을 살펴본다.
지난 5월19일 오전 11시 무렵 서울대 구내에 위치한 LG산학협동관 건물 안의 한 강의실. 강단을 마주보고 완만한 곡선 모양으로 배치된 책상 앞에 앉은 ‘중년의 학생’ 20여명이 김성수 서울대 경영대 교수의 ‘HR(Human Resource) 매니지먼트(인적자원 관리)’ 강의를 진지한 눈빛으로 경청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항공을 비롯한 한진그룹 주요 계열사의 신임 임원들이었다.
인적자원 관리는 기업의 성패가 달린 가장 중요한 업무 분야 중 하나다. 특히 기업에서 사업과 조직을 이끌어가는 임원들에게 인적자원관리는 무엇보다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이다. 그런 만큼 신임 임원들에게는 인적자원 관리가 적잖이 버거운 과제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기자가 찾은 시각, 마침 김성수 교수는 인사고과 방식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세계 일류기업으로 꼽히는 제너럴일렉트릭(GE)의 인사평가 제도 혁신 등 기업 현장의 실제 사례와 경영학자들이 학문적으로 정립한 이론을 버무려서 인사고과의 중요한 화두들을 언급해나가자 수강생들은 그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시종일관 눈을 반짝거렸다.
김성수 교수가 “(인사고과에서) 절대평가와 상대평가의 장단점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여러 임원들이 손을 들어 자신이 현업에서 경험했던 인사평가의 실제 여건과 문제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특히 교수와 임원들이 활발하게 토론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이날 강의는 한진그룹이 신임 임원을 대상으로 서울대에 위탁해 10주간 진행하는 ‘임원 경영능력 향상 과정(KEDP, Korean Air Executive Development Program)’의 일부다. KEDP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인재 중시 경영철학에 따라 임원의 자질 및 능력 향상을 위해 지난 2003년부터 개설·운영되고 있다. 주로 항공·물류산업 분야에 특화된 내용을 중심으로 사례 토론과 프로젝트 연구 방식으로 이뤄지는 교육 과정이다. 서울대 교수진 외에도 각 분야 전문가 등 국내 최고 수준의 강사진이 교육을 맡고 있다.
차세대 경영 리더들이 반드시 거치는 KEDP
강원애 서울대 경영대 연구소 교육과정 총괄팀장은 “KEDP는 한진그룹 임원들이 현업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현안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산학협력 프로그램”이라며 “액션러닝(Action Learning·실제 업무상 문제를 해결하면서 학습하는 훈련 방법) 방식의 교육 과정을 통해 임원들은 자연스럽게 경영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KEDP는 서울대 경영대가 운영하는 산학협력 프로그램 중에서도 굉장히 강도가 높기로 소문나 있다. 하루에 80분짜리 수업을 5교시에 걸쳐 소화해야 한다. 오전 9시 30분에 1교시가 시작해 오후 5시40분에 비로소 5교시가 끝난다. 각 임원들은 직접 2개의 연구 주제를 담당 교수에게 제출하고 예비발표, 중간발표, 최종발표 단계를 거쳐 마지막에는 소속 회사 최고경영자가 참관하는 가운데 자신의 학습 결과물을 평가받게 된다. 이 때문에 교육 과정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특히 KEDP에 참가하는 임원들은 과정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현업에서 완전히 벗어나 수업에만 전념하게 된다. 통상적으로 기업들은 임원 교육을 실시하더라도 업무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문 편이다. 임원들이 챙겨야 하는 업무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교육 과정의 충실을 기하기 위해 과감하게 임원들을 업무에서 제외시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번 KEDP 과정에 참가 중인 박요한 대한항공 상무의 말이다. “선배 임원들로부터 미리 학습량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교육 과정에 들어와 보니 굉장히 빡빡한 게 사실이더군요(웃음). 일과 후 저녁 시간에 예습과 복습을 해도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아요. 하지만 현업에서 궁금했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조금씩 배워나가는 데다, 교수님들도 우리가 관심이 많은 주제를 콕 집어 강의해주기 때문에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되고 있어요. 저는 이 과정이 끝나더라도 관심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KEDP에 참가 중인 동료 임원들도 교육 과정이 타이트하고 어렵지만 새로운 지식을 얻고 현업 문제들의 해결책도 배울 수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KEDP를 이수한 한진그룹 임원들은 모두 237명에 달하며, 이들 대다수가 각 계열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핵심 인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번 과정에 참가한 임원들은 대한항공 18명, ㈜한진 4명, 한국공항 2명 등 총 24명이다.
조양호 회장은 ‘기업은 곧 사람’이라는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한진그룹의 ‘인재경영’은 고(故)조중훈 창업주 시절부터 깊이 뿌리내린 전통이기도 하다. 조중훈 창업주는 인하대, 한국항공대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 등 교육사업에도 남다른 열정으로 헌신한 기업인이었다.
그는 생전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내게 가장 보람 있는 일이다. 교육은 백년대계이고 육영사업은 무한궤도 같다. 나는 항상 ‘기업은 인간’임을 마음에 새겨두고 인재 양성에 애썼다. 나의 육영사업이 우리나라를 더욱 발전시킬 동량을 양성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조중훈 창업주의 일대기를 다룬 책 ‘정석 조중훈 이야기-사업은 예술이다’에서)
선대 회장의 뜻을 계승한 조양호 회장은 인재경영을 더욱더 체계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다. 조양호 회장은 종종 항공산업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하곤 한다. 승무원, 정비사 등 다양한 분야의 인력이 조화롭게 협력해야 고객들에게 최상의 운송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빗댄 것이다.
‘인재경영’은 한진그룹의 확고한 철학
대한항공 관계자는 “조양호 회장은 평소 자신의 역할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신다”며 “항공사가 워낙 다양한 분야의 인력들이 함께하는 곳이기 때문에 모든 구성원들의 협력과 조화가 그만큼 중요하다 는 뜻”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다양한 직종 간의 유기적인 소통과 협력이 필수적인 업종 특성을 감안한 인재상을 신입사원 선발 단계부터 적용하고 있다. ▲항상 무엇인가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변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고자 하는 ‘진취적 성향의 소유자’ ▲자기중심적 사고를 탈피해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열린 마음과 문화적 지식을 지닌 ‘국제적 감각의 소유자’ ▲단정한 용모와 매너, 따뜻한 가슴으로 고객을 배려하는 ‘서비스 정신과 올바른 예절의 소유자’ ▲작은 일이라도 책임감을 갖고 완수하며 진실된 자세를 갖춰 내·외부의 고객에게 신뢰받는 ‘성실한 조직인’ ▲동료의 의견을 경청하고 화합하며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팀 플레이어(Team Player)’ 등이 대한항공이 지향하는 인재상이다.
이 같은 자질을 갖춘 인재 선발을 위해 대한항공은 지난해부터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기존 직무능력검사 필기 시험을 폐지하고 자기소개서와 면접의 비중을 강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객실승무원 채용 시험에서는 ‘상황별 대응 면접’을 통해 기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과 순발력, 서비스 직무 적합성 등을 다각도로 평가하고 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승객들 중에는 종종 과도한 행동을 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다”며 “젊은 응시자들이 당황스러워할 만한 상황을 부여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고 평가에 반영한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직원들이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 핵심 인재로 커나갈 수 있도록 경력개발 제도, 멘토링 제도, 글로벌 역량 강화 프로그램 등 다양한 인재 양성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경력개발 제도는 직원 개개인의 경력개발 단계를 설정해 체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멘토링(Mentoring) 제도는 신입사원들이 현업과 회사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멘토로 지명된 선임사원이 일정 기간 이끌어주도록 하는 제도다. 특히 멘토로 지명된 선임사원이 신입사원을 1대1로 전담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멘토링이 이뤄진다는 설명이다. 또 모든 신입사원은 입사 후 1년이 지나면 리프레시(Refresh)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회사의 전반적인 직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한편 스스로 경력개발 경로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고 있다.
또 대한항공은 글로벌 항공사 위상에 걸맞은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특히 인사, 재무, 리더십, 조직관리, 커뮤니케이션 등 조직에서 요구되는 각종 역량에 대해 직급별로 필수 이수 과정을 운영하는 점이 눈길을 끈다. 아울러 전체 직종 종사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하모니 워크숍(Harmony Workshop)’도 주목할 만한 제도다. 이 제도는 회사 전체의 조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직종의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내 소통 능력을 향상 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상위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내실 있게 운영되고 있다. 부장 승진 대상자들이 이수하는 ‘에어라인 매니지먼트 스쿨(AMS, Airline Management School)’과 신임 임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KEDP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중간간부와 임원들이 항공사에 특화된 전문지식과 경영능력을 쌓아 핵심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밑거름이 된다는 평가다.
이외에도 대한항공은 사내 공모를 통해 선발된 직원들을 국내외 유수 대학 경영학석사(MBA) 과정에 보내 학습 기회를 제공하고, 역량을 갖춘 실무자 및 중간관리자를 해외 취항지에 파견해 지역전문가로 키우는 제도 등을 통해 글로벌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대한항공의 인재 양성을 위한 노력은 세계 항공업계를 선도하는 글로벌 항공사로 도약하기 위한 미래 전략의 핵심이자 원동력”이라며 “지속적인 인재 양성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세계가 인정하는 항공사로 성장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국내 최초의 ‘사내대학’ 정석대학 배움에 갈증 난 직원들의 꿈을 이룬다
한진그룹은 국내 재계 최초의 사내(社內)대학인 정석대학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는 가정형편 등으로 대학 진학 기회를 얻지 못한 직원들의 배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기 위해 지난 1988년 한진산업대학(현 정석대학)을 설립했다.
당시 5,600여명에 달했던 한진그룹 고졸 직원들은 폭발적인 호응을 보이며 서로 입학하려고 경쟁을 벌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더욱이 조중훈 창업주는 1991년 2월 한진산업대학 1회 졸업식 때 “일반 대졸 직원과 한진산업대학 졸업 직원을 동등하게 대우하겠다”고 선언했다.
한진산업대학이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다른 기업들도 사내대학을 잇달아 설립하는 붐이 일어났다. 그 덕분에 1999년 교육부는 일정 요건을 갖춘 사내대학의 졸업생에 대해 학위를 인정해주는 법안을 도입하게 됐다.
한진그룹은 1999년 4월 학교법인 한진학원을 설립하고, 그 해 8월 정부로부터 한진산업대학에 대해 학위 인정 사내 기술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한진산업대학은 2000년 정석대학으로 명칭을 바꾸고 학사 학위와 전문학사 학위 과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정석’은 조중훈 창업주의 호이다. 정석대학은 2002년부터 올해까지 총 1,29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전신인 한진산업대학 졸업생 2,429명을 포함하면 모두 3,72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 정석대학은 일반 대학 과정에 해당하는 학사 학위(경영학과, 산업공학과, 항공시스템공학과)와 전문대학 과정에 해당하는 전문학사 학위(항공시스템공학과) 등 4개 과정을 각각 2년제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한진그룹은 정석대학 운영비 및 재학생 학비 전액을 무료 지원하고 있다. 아울러 졸업생에게는 성적에 따라 호봉 승급을 주고, 우수 졸업생으로 선정되면 승진 시 가점을 부여하는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정석대학 졸업생 중에는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임원까지 승진한 사례도 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