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로스차일드 대박 투자의 진실



1815년 6월 20일, 런던 증권거래소. 투자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개장과 더불어 투자자들은 ‘로스차일드의 기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정보가 빠르다고 정평 난 네이선 로스차일드(Nathan Rothschild· 당시 37세)는 주식이나 채권을 사고팔 때 늘 기둥에 기대어 결정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주목했던 정보는 이틀 전인 6월 18일, 네덜란드(요즘은 벨기에 영토) 워털루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과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프로이센 동맹군 간 워털루 전투의 승패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쏠렸다.






정작 정보는 거의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6월 17일 토요일 전해진 ‘프랑스 대군이 싸움터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최신 뉴스였다. 영국이 불리하다는 소문도 돌았다.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유럽의 정세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대외 신뢰도와 국채 가격이 널뛸 게 분명한 상황.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던 로스차일드는 천천히 주문을 냈다. 보유하고 있는 영국 공채(consol) ‘전량 매도’. 투자자들은 순간 ‘영국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했다’는 판단 아래 콘솔을 집어던졌다. 신중하던 투자자들까지 투매 대열에 합세해 액면가 100파운드짜리 콘솔 가격은 5파운드까지 급락했다.

시장이 공포에 젖어 콘솔을 내던지는 상황에서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대리인들을 풀어 비밀리에 콘솔을 사들였다. 30 파운드 이하면 매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던 비밀 대리인들은 헐값으로 떨어진 콘솔을 사 모았다. 다음날 런던의 신문들은 일제히 ‘영국군, 대승’, ‘나폴레옹 몰락’을 대서특필했다. 폭락했던 영국 공채 가격은 단박에 하락 폭을 만회하고 일주일 내내 올랐다. 전 재산을 털어 영국 공채를 사들였던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상투에서 팔아 유럽 제일의 금융가문으로 발돋움하기에 충분한 이익을 얻었다. 네이선뿐 아니라 파리에 진출했던 막냇 동생 제임스도 비슷한 수법으로 프랑스 국채를 사고팔아 막대한 차익을 올렸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다. 국내에서만 수백만 부가 팔린 영국 작가 데릭 윌슨의 ‘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원제 Rothschild : A story of wealth and power)’을 비롯해 중국 작가 쑹홍빈(宋鴻兵)의 ‘화폐 전쟁’ 등 초베스트 셀러에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작전이 자세하게 소개된다. 특이할 만한 대목은 설이 많다는 점.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 거래에 투입했다는 금액(추정액)도 100만 파운드에서 5,000만 파운드까지 제각각이다. 추정 이익 규모도 1,000만 파운드~2억 3,000만 파운드, 1억 3,500만 프랑 등 다양하게 나온다. 심지어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웰링턴 장군과 함께 워털루 전투를 지켜봤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대박 투자 신화가 사실인지 여부는 의심할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반론도 많다. 니얼 퍼거슨 교수(하버드대 역사학, 스코틀랜드 출신)의 ‘전설의 금융 가문, 로스차일드’에 따르면 사실은 신화와 정반대다. 콘솔 공채 투자로 거대한 차익을 챙기기는커녕 쪽박을 찰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1815년 3월)하자 전쟁이 오래갈 것으로 보고, 금(金)을 대량 매입했으나 나폴레옹의 재등장이 일회성 태풍으로 그칠 징후가 보이자 필사적으로 콘솔 공채를 사들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굳이 사료를 찾지 않더라도 정황상 네이선이 영국 콘솔 공채를 미끼 삼아 런던의 투자자 전체를 바보로 만들며 홀로 거대한 부를 쌓았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네이선이 ‘가출하듯’ 함부르크를 떠나 영국에 진출한 시기가 1798년. 철물과 비단 수출입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네이선은 분명 전쟁을 기회로 삼았다. 나폴레옹의 배후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게릴라전을 치르던 웰링턴 장군의 병참과 유럽 내 동맹군 지원을 맡으며 사업 규모를 불린 것. 나폴레옹이 ‘나를 괴롭히는 궤양’이라고 불렀던 스페인 전선을 유지하고 동맹군 군대의 이탈을 막는 자금 공급을 도맡으며 입지를 다지고 거대 상인으로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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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했을 때, 황금기가 다시 올 것으로 기대한 네이선은 언제라도 현금화할 수 있는 수단인 금을 사 모았다. 유럽 전역에 깔아 놓은 정보망에서 ‘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것 같다’는 보고를 받은 네이선은 워털루 전투 이전부터 금을 팔고 조금씩 영국 공채를 사들였다. 본격적으로 공채에 손을 댄 시점도 속설과는 다르다. 퍼거슨 교수의 다른 저서 ‘금융의 지배(원제 The ascent of money)’에 나오는 그래프를 보자. 네이선이 콘솔 국채를 대규모로 사들인 시기는 1815년 7월과 12월, 1816년 10월. 세 차례에 걸쳐 57, 62, 67% 선에서 콘솔을 매입한 네이선은 1817년 11월 이를 84% 수준에서 팔아치웠다.



보다 장기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봐도 네이선이 매도한 시점은 최고점 매도에 해당되지만 워털루 전투와는 뚜렷한 인과 관계가 없다. 1812년에서 1823년까지 콘솔의 가격 그래프에서 워털루 전투 전후의 급등락은 잘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네이선이 런던 거래소에서 분탕질할 때 프랑스에서 막냇 동생 제임스도 같은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대목은 더욱 근거가 없다. 네이선 보다 15살 어린 제임스는 1811년(19살)에 파리로 이주해 1817년부터야 본격적인 금융업에 나섰다.



나라의 흥망이 걸린 전투를 대놓고 돈벌이에 활용한다는 행태도 로스차일드 가문과는 거리가 있다. 네이선과 제임스를 포함해 다섯 아들을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로 보내 로스차일드 금융제국의 씨앗을 뿌린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생전에 유대인이라는 점은 잊지 말되 뿌리내린 곳인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네이선 자신도 1806년 이미 영국으로 귀화해, 웰링턴 장군 등과 애국심을 내세워 인연을 맺었다. 네이선 사망 이후 아들인 라이오넬은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으로는 처음으로 영국 의회에 진출하는 기록을 남겼다. 네이선이 워털루 전투의 정보를 이용해 돈을 챙겼다면 그 아들의 정계 진출이 가능했을까. 파리의 제임스는 1870년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 패배했을 때, 50억 프랑 배상금 모집에 앞장서 프랑스인들에게 애국 시민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전황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 투기에 악용했다는 설이 퍼진 이유는 두 가지 때문으로 풀이된다. 첫째, 로스차일드 가문의 정보력이 탁월했다는 점. 정부의 공식 정보 라인보다도 빨랐다. 작가 데릭 윌슨의 ‘유대 최강 상술 로스차일드(원제 Rothschild, A Story of Wealth and Power)’에 따르면 웰링턴 장군의 승전 보고가 런던 육군 본부에 전해진 시각이 6월 20일 밤 11시. 전속 부관인 헨리 퍼시 육군 소령은 전투가 끝나자마자 출발해 잠시도 쉬지 않고 말 달리고 배를 갈아탄 끝에 그 시각에 승전 소식을 알렸다. 반면 네이선은 비둘기 통신과 쾌속 요트를 활용해 최소한 30시간 이전에 승전 소식을 접했다.

두 번째 요인은 반 유대인 정서. 우선 유럽을 쥐락펴락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로스차일드의 지원이 없는 한 유럽의 어떤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옛날 유대인은 한 왕(로마 황제)에게 복종했는데 지금은 유럽 군주들이 한 유대인에게 머리를 조아린다’는 말이 생길 만큼 로스차일드의 권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반감도 커진 것, 국제 유대인 운동이 시작되던 19세기 중후반부터 ‘로스차일드가 전쟁으로 한탕 했다는 신화’가 다시금 고개 들었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부풀려진 워털루 전투 정보를 활용한 한탕 신화는 나치 독일의 선전상 괴벨스가 제작비를 지원한 영화 ‘로스차일드’로 인해 각국에 퍼졌다.

나폴레옹 전쟁이 마무리된 워털루 전투로부터 202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로스차일드 대박 투자 사건’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분분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숨어서 세계를 조종한다는 음모론도 돌아다닌다. 음모론에는 러시아 혁명과 세계 대공황, 중동의 분할, 석유 파동도 로스차일드가 결정했다는 설까지 있다. 심지어 로스차일드의 재산이 6경원이 넘는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고개를 든다. 포브스지가 추정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15억 달러. 유럽 각지의 저택과 성(城), 포도주 생산농장의 가치만 따져도 포브스의 평가 이상으로 보이지만 수 경원대에 이른다는 주장은 너무 많이 나간 것 같다.

로스차일드의 실체는 202년 전이나 오늘날도 여전히 미스터리의 영역이다. 정보 독점 구조가 깨진 데다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촌끼리의 근친혼에 집착한 폐쇄성이 가져온 유전적 후유증으로 뛰어난 상재를 지닌 인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한계에도 로스차일드를 둘러싼 음모론의 생명력은 질기디질기다. 중동 정세가 불안하고 국제 유가라도 치솟으면 어김없이 등장한다. 8대에 이르도록 부를 세습해온 로스차일드 가문이 과연 아직도 힘을 갖고 있을까. .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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