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위원장이) 예측 가능하고 신중하게 정책을 펴겠다고 했다. 아주 안심하고 돌아간다.”(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
23일 서울시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의 간담회를 마치고 나온 4대그룹 최고경영자(CEO)들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묻어났다. 비공개 간담회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2008년 당시 백용호 위원장이 전경련 회장단과 만나 출자총액제한제 등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눈 후 9년 만에 공정위 수장과 재계가 마주앉은 자리. 특히 정규직 확대, 최저임금 인상, 일감 몰아주기 근절 등 문재인 정부가 취임 일성으로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는 만큼 이날 간담회에 자리한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정진행 현대차 사장은 “공정위가 일감 몰아주기를 엄벌하겠다고 하는데 현대글로비스 등 계열사의 내부거래 비중을 줄일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마 오늘 (비율을) 정해주지 않겠느냐”며 내심 불안한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간담회 전 모두발언에서 “소수 상위 그룹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다수 국민의 삶은 오히려 팍팍해진 것은 큰 문제”라면서 “최대한 인내심을 가지고 기업인들의 자발적인 변화를 기다리겠지만 한국경제와 우리 기업에 남겨진 시간은 많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밝힐 때도 최고경영자(CEO)들의 표정에는 ‘올 게 왔구나’ 하는 경계심이 읽혔다.
간담회에서 무슨 내용이 오갔길래 모두 웃으며 나왔을까. 스스로 “오늘 제가 가장 말을 많이 했다”는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생각하는 경제민주주의는 물론 지난 수요일 경제부총리, 청와대 정책실장과 나눴던 얘기들도 상세하게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여러 차례 표현했던 것처럼 신중하고 합리적이며 예측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기업 정책을 이끌어나가겠다는 부분을 CEO 분들께 약속했다”면서 “특히 앞으로도 공개적으로 여러 기업인들을 만나 소통하면서 정책을 해나가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하현회 ㈜LG 사장은 “공정위원장이 진솔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기업 입장에서 정책의 방향을 공감할 수 있었다”며 “소통과 대화를 통해 제대로 된 성공 사례를 만들어보자는 데 뜻을 함께했다”고 전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가장 큰 소득을 얻은 것은 현대차였다. 정진행 사장은 간담회를 마치고 나와 “가장 큰 화두가 일감 몰아주기인 만큼 위원장에게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며 “양적인 규제책보다는 질적으로, 산업의 특수성을 감안해 신중하게 하겠다는 위원장의 말씀을 듣고 안심하고 돌아간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그룹 계열사인 현대글로비스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 등 총수 일가의 지분이 29.9%로 공정위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기준인 30%에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다. 김 위원장이 이에 대한 지적을 꾸준히 해온 터라 재계에서는 규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예상해왔다. 정 사장은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위원장이 규제 강화와 관련해 구체적인 수치는 언급하지 않았다”면서도 “다만 속도 조절을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고 이에 대한 해법을 찾아간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앞으로도 기업 정책을 펼치면서 이해당사자인 기업들과 꾸준히 소통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해관계자와 시장 충격 등을 고려할 때 기업과 관련된 내용을 모두 밝히기는 어렵다”면서도 “그러나 만남 자체는 반드시 사전에 밝히고 꼭 공개적으로 하겠다”고 강조했다. 공정위원장과 기업이 밀실에서 비공개 회동을 할 경우 특혜가 오갈 수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기업집단별로 개별 만남도 이어가기로 했다. 김 위원장은 “그룹마다 특출한 상황이 있고 함께 모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얘기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서 “기업 여러분들께서는 면담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따라 김 위원장과 현대차그룹의 면담이 조만간 진행될 것으로 관측된다. /조민규·강광우기자 cmk25@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