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 왕의 역할을 잘하는 배우

문정희作

2715A37 왕궁




왕의 역할을 잘하는 배우가


부도내고 노숙자로 떠돌 때

헌 신문지 한 장 가진 사람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는 얘기는

그의 연기보다 더 시큰하다

채권자에게 쫓기며 빌딩숲 사이

맨 바닥에 누워 잘 때

곁에서 자던 노숙자가


덮고 있던 신문지를 반으로 찢어 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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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으로 밤새 추위를 덮고

절망을 덮고

아침에 온기로 눈을 뜨자 그대로 일어서서

무대로 돌아갔다는 얘기는

기교 넘친 드라마보다 더 시큰하다

헌 신문지 반장이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운

그날 아침 얘기는

시시한 시보다 콧마루가 더 시큰하다

‘왕의 역할을 잘하는 배우’가 노숙자에게 신문지 반 장을 얻어 덮고 무대로 돌아갔다는 아침방송 이야기를 다시 시로 전해 듣는 것도 콧마루가 시큰하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의 뒤바뀐 왕자 에드워드가 조마조마 갖은 고생을 하다가 섬마섬마 다시 왕좌에 오른 것처럼 기쁘다. ‘왕의 역할을 잘하는 배우’에게 신문지를 나눠주었던 사람은 ‘노숙자 역할을 잘하는 배우’였겠지? 얼떨결에 왕자가 되고도 한사코 진짜 왕자를 찾으려 애쓰던 착한 거지 톰은 또 다른 왕자가 아니었을까? 누구라도 툭툭 털고 일어나 되찾아갈 자기만의 왕궁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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