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바스티아, ‘법은 조직화한 정의다’






에피소드 1.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파리 - 마드리드 노선 철도 건설이 논의될 때 이색 제안이 나왔다. 한 의원이 보르도 지역에서 철로 연결을 끊고 틈을 내자고 주장한 것. 승객과 물자가 환승하는 과정에서 보르도 지방의 뱃사공과 운송업자, 호텔이 호황을 누리고 결국은 국민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였다. 지역 이기주의에 근거한 탐욕스러운 제안은 누군가의 신랄한 공격을 받았다.

‘보르도가 철로를 끊어 이익을 얻을 권리가 있다면, 또한 그 이익이 국민 전체에게도 돌아가는 것이라면 프랑스의 모든 도시는 물론 그 중간 지점까지 국민적 이익이라는 이름을 걸고 철로에 틈을 내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틈이 많을수록 하역과 운송, 보관 수입이 늘어날 것 아닌가. 정말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틈새’로만 구성된 철도, 즉 선로 없는 철도(negative railway)를 가지게 될 것이다.’ 철도 단절 논란은 바로 사그라졌다.

에피소드 2. 프랑스 의회가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올리는 법률개정안을 가결한 직후 누군가 청원서를 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막강한 외부 경쟁자로 인해 우리는 고통받고 있습니다.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낮은 가격 때문에 죽을 맛입니다. 외부 경쟁자의 이름은 바로 태양입니다. 바라옵건대 낮에 모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법을 만들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자연광인 태양에 접근하는 길을 차단한다면 인조광에 대한 수요는 증가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프랑스의 양초업자들이 혜택을 받게 되고, 양초의 재료인 동물 기름을 생산하는 낙농업도 발전해 소와 양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유제품과 육류 소비가 늘면 올리브 경작지도 확대되겠지요. 황무지는 바로 초원과 올리브 농장으로 바뀔 것입니다. 부디 결단을 내려 주소서. 의원님들께서 가격이 아주 낮다는 이유로 철과 옥수수 등 외국상품을 금지하면서도 아예 가격이 없는 태양광선을 온종일 용납한다는 점은 이치에 어긋납니다. 한시라도 빨리 햇볕을 차단하는 법을 제정해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청원서의 제목은 ‘양초·등잔·램프·가로등·초심지 자르는 가위와 소화기 제조업자와 유류·수지·알코올과 기타 등화와 관계있는 모든 물건의 생산자들이 올리는 소청’. 하지만 이 청원서는 의회에 전달되지 않았다. 글을 작성한 사람도 업자들이 아니었다. 철도를 끊어 물류와 유통의 중심지로 삼자는 구상에 일침을 날린 ‘누구’와 동일 인물. 끌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Claude Frederic Bastiat)가 두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다. 1801년 6월 30일, 프랑스 남부 베욘에서 태어난 바스티아는 경제사상가 중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20세기 전반부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로부터는 ‘역사상 가장 재기가 뛰어난 경제 저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를 일곱 살에, 아버지를 아홉 살에 여위고 친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몸도 약해 폐결핵을 앓으며 대학도 가까스로 마쳤다.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영어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익힌 후 가족이 경영하는 수출 기업에 취직했으나 오래 다니지 못했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개인사업과 농업에 진출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어도 독신처럼 지냈다. 1830년 7월 왕정의 반동정치를 몰아낸 혁명을 겪으며 지방판사, 지방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독학으로 경제와 역사, 철학, 법학을 공부하던 그는 신문과 학술지에 끈질기게 기고문을 보냈지만 채택되지 않다가 1844년에야 학술지에 처음 수록된 ‘양초업자의 탄원서 풍자’로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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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가, 평론가로 유명세를 타던 그는 자유무역 옹호에 매달렸다. 1846년 프랑스 자유무역협회를 창립하고 주간지도 만들었다. 1848년 2월 프랑스 시민들이 부패한 정부에 항거해 시민들의 봉기로 성립된 제헌의회, 입법의회에서는 연달아 선거에 승리, 의원직을 얻었다. 1849년 입법회의 재정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정부 지출 삭감과 세금 인하, 자유무역 정책을 추진했으나 번번이 막혔다. 자유무역에 대한 신념의 정책화 실패로 좌절하며 지병인 폐병이 도진 그는 185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숨을 거뒀다. 향년 49세. 임종할 때 남긴 단 한마디가 ‘진리(La Veritie)…’였기 때문일까. 사후인 1868년 출판된 논문집은 요즘도 자유무역 옹호론의 교과서로 꼽힌다.

평생 자유 무역과 정부 개입 축소를 주장했던 그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상대가 자유무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못 한다고 말하지 맙시다. 상대국의 해안이 모두 암벽이기 때문에 우리의 멀쩡한 항구를 바위로 막아야 하는 것과 같으니까.’ 바스티아는 관료나 국회의원이 다수 국민의 이익은 도외시하거나 희생시켜 특정 집단의 배를 불릴 때마다 규제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고 봤다. 바스티아는 이런 규제가 입법 활동이라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탄생한다며 특정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입법이나 행정을 ‘법이나 정치의 도움으로 타인의 재산을 사실상 강제로 빼앗는 합법적 약탈’이라고 이름 붙였다.

‘경기 부양과 일자리 확대를 위해 군대를 키우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바스티아는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방위를 위해 군대를 키우자면 말이 된다. 하지만 ‘경제를 살리기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는 엉뚱하다. 만약 군대를 키워 경제가 산다면 모든 장정을 입대시키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런 논리는 상점마다 유리창을 깨뜨리면 유리산업이 번성하고 경기가 회복된다는 말과 같다. 심지어 낮에도 실내에서 커튼으로 햇빛을 가리도록 법으로 강제하면 양초산업을 비롯한 연관산업이 융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도 닮았다.‘

자유무역과 사유 재산의 상속을 옹호했던 그는 동시대 사람들이 평가할 만한 업적을 못 남긴 채 50년도 못 살고 죽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재조명받고 있다. 주로 우파 경제학자들이 그의 진가를 높이 친다.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모든 계획 경제와 정부의 간섭이 전혀 필요 없다고 강조했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바스티야는 경제학자 가운데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 체계적인 경제학설을 주창하지는 못했어도 그를 한계효용론의 시조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자신을 ‘지식소매상’이라고 규정하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저서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에서 바스티아의 한계를 지적한다. 유 전 장관의 바스티아에 대한 평가를 종합하면 특장점은 두 가지다. 무엇보다 ‘남의 말에서 논리적 모순을 끄집어낸 후, 그것을 웃음거리로 만드는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노동을 ‘생산적 서비스’로 풀이하는 시각도 특이하다. 그러나 ‘생산적 서비스’를 노동자들에게 국한했을 뿐 지주나 자본가들에게 적용하지 않았다. 특히 ‘19세기 유럽의 지주와 자본가들이 어떻게 최초의 자본을 소유했는지를 따져 보지 않았다. 당시의 재산분배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고 옹호했을 뿐이다.’

바스티아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진영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다방면에 관심을 가져 ‘국가’와 ‘법’에 대해서도 책을 썼던 바스티아는 법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법이 타락하면 정의와 불의에 대한 판단 기준이 흐려지고 정치의 역할이 지나치게 커진다. 법은 조직화한 정의(正義)다.’ 마지막 문장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바스티아가 그토록 강조했던 자유 경제, 상속을 비롯한 사유재산에 대한 정부의 불간섭도 ‘조직화한 정의로서 법’이 살아 있을 때만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닐까. 불공정한 법과 제도, 정치에 의해 경제가 왜곡된 사회가 있다면 바스티아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한국의 법은 정의로운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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