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로슈진단을 맡는 건 제 인생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단한 도전(challenge)’이었습니다. 한국 생활 2년째인 지금은 충분히 성공적인 정착기였다고 자평합니다.”
홍콩 출신의 리처드 유(사진) 한국로슈진단 대표는 꼭 2년 전인 지난 2015년 4월 한국행을 결정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도전이었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그는 “한국로슈진단의 대표로 가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 솔직히 고민이 많았다”며 “한국어를 전혀 못했고 한국의 유니크한 문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한국로슈진단이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받은 전례가 없다는 점과 한국 생활을 경험한 적 없는 아내와 아들이 함께 감내해야 한다는 점도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국로슈진단은 1896년 스위스 바젤에서 창립한 세계적인 헬스케어그룹 로슈의 핵심 사업부 로슈진단의 한국법인이다. 질병의 조기 발견과 예방·진단·치료를 목적으로 인체로부터 채취한 혈액·체약·조직 등을 검사하는 혁신적인 체외진단기기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하고 있다. 유 대표는 1990년 100%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문을 연 한국로슈진단이 맞이한 첫 번째 외국인 CEO다.
다행히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한국로슈진단의 리더가 된다’는 사실이 주는 우려보다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유 대표는 “로슈그룹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한국 조직의 체계가 굉장히 잘 잡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특히 팀워크가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어 리더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으로 기대됐다”고 덧붙였다. 기약 없는 외국 생활을 해야 하는 만큼 가족들의 뜨거운 지지와 응원도 그의 결정에 한몫했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 생활이 벌써 2년째. 유 대표는 한국 정착기가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다. 그와 가족들은 주말마다 한강변이나 남산을 걷고 계절을 만끽할 수 있는 야외활동을 자주 즐긴다.
유 대표는 “여름이면 해변을 가고 겨울이면 스키를 타는 등 한국의 뚜렷하고도 아름다운 사계절을 즐기는 건 다른 나라에 살다 온 사람에게는 쉽게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놀랍고도 즐거운 경험”이라고 극찬했다.
업무적인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유 대표는 한국에 오기 직전 중국로슈진단의 진단검사 사업부 및 조직진단 사업 본부장을 겸임하며 회사의 성장을 이끈 주역으로 인정받았다. 중국로슈진단은 세계 150여개국에 자리 잡고 있는 로슈진단 지사 가운데 미국에 이어 2위 매출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는 “한국은 중국에 비해 시장 규모는 작지만 뛰어난 보건의료 인프라를 바탕으로 신흥시장에서 선진시장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곳”이라며 “한국팀의 탄탄한 조직력에 글로벌 사고방식을 더할 수 있다면 로슈가 추구하는 혁신을 가장 빠른 속도로 달성할 수 있다고 믿고 다양한 방식으로 도전 중”이라고 말했다.
◇글로벌·수평적 조직문화로…로슈는 변신 중=유 대표가 한국로슈진단의 리더로서 목표로 하는 지점은 조직을 좀 더 글로벌하고 수평적 문화를 가진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인터뷰 중에도 여러 차례 “한국의 조직문화는 여러모로 굉장히 독특하다”고 언급한 유 대표는 “여느 조직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팀워크가 있지만 한편으론 ‘하이어라키(hierarchy·위계화된 조직구조)’ 문화가 강해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나는 한국의 인재들이 여러 방향에서 ‘오픈’되기를 희망한다”고도 강조했다.
변화를 위해 시작한 대표적인 활동이 바로 ‘히어로(HearRo)’ 캠페인이다. ‘로슈(Roche)를 듣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캠페인은 ‘너 오늘 왠지 멋져 보인다’같이 서로의 사기를 북돋우는 말을 회사가 주기적으로 지정하고 직원들이 사용하게 권장하는 것이다. 서로 존중하고 격려하는 문화를 정착시켜 궁극적으로 다 함께 ‘히어로(영웅)’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직원들을 글로벌 인재로 양성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유 대표 취임 후 한국로슈진단의 직원들은 거의 매달 또는 2주 간격으로 해외 지사에서 파견 온 인재들과 만나고 있으며 올해 들어서만 5명의 직원이 일본과 베트남 등 5개국에 3개월간 파견근무를 가는 등 해외 경험을 쌓고 있다. 유 대표는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 직원들이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로슈진단의 장점과 직원들의 우수한 능력도 잘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유 대표가 심혈을 쏟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한국로슈진단의 지속적 성장이다. 그는 본사의 혁신제품을 좀 더 빠르게 한국 시장에 도입하고 질병 치료, 건강관리와 결합한 통합진단을 통해 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쓰고자 한다. 유 대표는 취임 직후 직원들과 6개월간의 토론 끝에 정립한 생각을 모두 담아 ‘비전2020, 혁신을 선도하고 함께 성장한다(Leading innovation, growing together)’라는 이름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가시적인 성과물이 속속 나오는 중이다. 글로벌 인사조직 컨설팅 기업인 에이온휴잇이 선정한 ‘한국 최고의 직장’ 본상 부문에 2015년과 2016년 2년 연속 이름을 올렸으며 2014년 체외진단 기업 최초로 국내 연매출 2,000억원을 돌파한 실적 역시 유지하고 있다.
◇“우리 진단기술이 의미 있는 치료로 이어질 때 가장 기뻐”=평소 솔선수범하는 태도에다 착실한 업무 스타일로 ‘모범생 CEO’라는 별칭이 따라다니는 유 대표는 열정을 유지하는 원동력으로 “우리가 만드는 진단기술이 환자의 삶에 미치는 의미”를 꼽았다. 이는 그가 20년 가까이 몸담고 있는 로슈진단이 지향하는 목표와도 관련이 깊다. 유 대표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 만약 암에 걸려 고통받을 때 우리 회사의 진단기술을 활용해 좀 더 의미 있는 치료를 받게 도울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쁠 수는 없을 것 같다”며 “그런 생각들이야말로 내가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에너지와 의미를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긍정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배움과 성장에 열려 있다는 점도 유 대표의 리더십을 탄탄하게 만든 원동력으로 꼽힌다. 실패 경험을 묻는 질문에 “크게 실패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무엇이든 끊임없이 도전한다면 결국 성공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교훈을 얻었던 중요한 계기로 암 정밀진단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벤타나 메디컬 시스템스’의 성공 경험을 소개했다. 벤타나는 2008년 로슈에 합병된 자회사다. 유 대표는 “오랜 기간 로슈라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2008년 비교적 신생기업인 벤타나의 지역 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셈인데 스타트업 비즈니스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처음 알게 됐다”며 “인지도도 낮고 자원도 많이 부족한 탓에 외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끝없이 해결책을 모색했고 3년의 노력 끝에 벤타나의 유방암 검사(Her2 테스트)를 대다수 병리학자들이 사용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당시 경험을 통해 기업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며 “정확한 방향을 설정하고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는 일, 비전을 가지고 팀원들과 공유하는 일이 성공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깨닫게 된 중요한 계기”라고 말했다.
당시 그가 깨달았던 교훈을 최근 한국어 공부에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 영어나 중국어 모두 유창하게 구사하는 유 대표는 한국어에 도전했다가 두 달 만에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암기에 약한 그로서는 변화무쌍한 한국어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는 최근 한국어 정복에 다시 도전했다. “스웨덴에서 온 직원이 있는데 나보다 더 빨리 한국어를 배우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나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며 반드시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사진=송은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