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5대 컨설팅 회사인 아서앤더슨은 글로벌 금융시장을 요동시킨 ‘엔론 사태’와 연관된 회계부정으로 2002년 문을 닫는다. 90년 역사를 가진 회사의 종지부를 찍게 한 것은 한 통의 e메일이었다. 당시 엔론 회계조작 혐의로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이었는데 회사 소속의 한 여성 변호사가 직원들에게 보낸 여러 e메일 중 한 통에서 불법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문제의 메일에서 “회사를 보호하기 위해”라며 메모 하나를 위변조하도록 요청했다. 배심원들은 이를 근거로 관련자의 유죄를 결정했다. 죄명은 ‘사법방해죄’였다.
미국 법체계상 사법방해죄는 형법의 죄목이다. 말 그대로 사법절차, 즉 거짓 진술이나 허위자료 제출 등으로 수사나 재판 절차를 막거나 방해하는 행위에 적용된다. 다른 죄목으로 기소돼 있더라도 사법방해죄로 비화하는 경우가 많고 5년 또는 10년 이하 징역에 처할 정도로 중죄다. 증인이나 배심원의 출석을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행위까지 적용 대상이 될 정도로 사법절차의 방해만 인정되면 거의 모든 행위가 포괄된다.
그래서 면책특권이 있는 미국 대통령의 탄핵이 거론될 때마다 단골 사유가 사법방해다. 미국 역사에서 두 번째로 탄핵안이 하원을 통과한 빌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사유도 사법방해였다.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한 성(性)추문이 아니라 그가 특별검사의 수사 때 한 위증이 탄핵의 직접적 이유였다. 반대파도 ‘대통령의 거짓말’을 인정했지만 탄핵할 만한 중대 사안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워터게이트 호텔 도청 사건으로 유명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도 이 사안이 사법방해에 해당한다며 탄핵 직전까지 갔다가 중도에 사임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12일(현지시간) 미 하원에 발의됐다. 이 탄핵안의 주요 사유는 트럼프가 자신이 연루된 ‘러시아 스캔들’에 대한 연방수사국(FBI) 수사를 훼방함으로써 사법방해를 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당론 추진도 아니고 상원 등 후속 절차가 남아 트럼프의 탄핵 여부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법 적용과 대상에서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미국 사회의 정신으로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의 사법방해 논란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온종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