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아우라,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단어

작가

오직 그 존재만이 가진 무형의 빛

사랑하는 연인들 매순간 주고받아

관계 살아서 숨쉬게 하는 매개체

유일무이 빛으로 우리의 삶 비춰

정여울 작가정여울 작가




어떤 단어는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 속에 환한 등불이 켜진다. 아우라라는 단어가 그렇다. 내가 들어본 최고의 칭찬에도 아우라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스물여섯 살의 어느 쓸쓸한 가을날, 내가 진로와 적성문제로 고민하며 ‘도무지 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자 선배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마, 너는 그 나이에 벌써 너만의 아우라가 있잖아” 설마, 난 그런 거 없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선배의 말에 담긴 진심만은 받아들였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던 내 마음에 아우라라는 단어는 그렇게 커다란 위로가 되어줬다. 난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겐 벌써 나만의 아우라가 있잖아, 이렇게 스스로를 토닥이며 ‘근거 없는 자신감’에 벅차올랐던 것이다.

2915A27 언어정담



단 한번뿐인 존재의 영원한 반짝임, 다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오직 그 존재만이 지닌 무형의 빛. 그것이 내게는 ‘아우라의 힘’으로 다가왔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라는 단어가 지닌 힘을 이렇게 묘사했다. 옛날 옛적 모든 것을 다 갖추었으나 전혀 행복하지 않은 왕이 있었다. 그는 갑자기 산딸기 오믈렛이 먹고 싶어졌다. 오래 전 전쟁 중에 쫓기며 산골짜기의 한 노파에게서 얻어먹은 산딸기 오믈렛의 맛을 재현할 수만 있다면 그 깊은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왕은 궁정요리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전쟁에서 참패하고 길을 잃어 기진맥진한 채 한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였네. 한 노파가 뛰쳐나와 반기며 산딸기오믈렛을 먹여주었지. 오믈렛을 먹자마자 난 기적처럼 기력을 회복했고 희망이 샘솟았지. 자네가 그 오믈렛을 만든다면 짐의 사위가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음뿐이네” 뛰어난 솜씨를 지닌 궁정요리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폐하!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오믈렛의 레시피를 훤히 알지만 폐하가 드신 오믈렛의 재료는 구하지 못합니다.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절박함, 부엌의 따스한 온기, 뛰어 나오며 반겨주는 온정,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어두운 미래. 이 모든 분위기는 제가 도저히 마련하지 못하겠습니다.” 벤야민의 ‘산딸기오믈렛’이라는 글에 나오는 명장면이다. 나는 이 글을 읽은 뒤로 더욱 아우라라는 말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이 산딸기 오믈렛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 속에 벅찬 기운이 느껴지고 입안에 달콤한 침이 고였다. 젊은 시절 그 왕이 먹었던 산딸기 오믈렛의 아우라는 이 세상 최고의 요리사라 할지라도 쉽게 복제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라는 것이 ‘먼 산에서 건듯 불어온 바람’을 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나먼 곳에서 아련히 다가오는 듯한 존재의 깊이, 반드시 그곳에 가야만 절절히 느낄 수 있는 것, 그곳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절실한 감정. 이것이야말로 아우라의 유일무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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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통해서도 아우라를 느낀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서로의 아우라를 매순간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내 존재의 빛을 상대방에게 비추면 상대방 또한 버선발로 마중 나와 자신이 지닌 존재의 빛, 아우라를 선물해준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소통의 과정이다. ‘사랑이 식었다’는 사실을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대번에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아우라의 드나듦을 인지하는 마음의 회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아우라의 소통이 불가능해졌을 때, 즉 자신이 지닌 존재의 빛을 상대방에게 자연스럽게 뿜어낼 의지와 욕망이 없어져 버렸을 때 관계는 화석화되어버리고 만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아우라를 발산한다. 모방만 있고 창조는 없는 곳에는 아우라가 발생할 수 없다. 유행에 따르고 대세에 따르다 보면 자신만의 아우라를 가꾸고 피워낼 기회가 없어져 버린다. 아우라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통해 나는 절감한다. 때로는 종교 없이도 초월이 가능하다는 것을.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우리가 지닌 내면의 힘만으로도 초월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이미 지닌 사랑과 자유만으로도 이미 천상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음을. 삶이란 어쩌면 우리가 저마다 지닌 아우라의 씨앗을 좀 더 풍요롭고 영롱하게, 맑고 향기롭게 가꾸고 다듬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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