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혹은 광복 직후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 모자다. 서양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중절모와 리본띠의 둥근 햇(hat)등이 패션 유행의 하나로 빠르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국내 유일 프리미엄 모자 기획디자인생산업체 ‘샤뽀’는 인기 시대극에 필요한 모자를 제작단계에서부터 의뢰받아 직접 만들어 공급하고 있다. 영화 ’모던보이’, ‘암살’, ‘밀정’, ‘석조주택살인사건’ 등 시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는 모자는 대부분 샤뽀의 브랜드 ‘루이엘’ 제품이다.
31일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조현종 샤뽀 대표는 “단순히 모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해당 시기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고증하는 과정을 거쳐 제작하는 곳은 샤뽀가 유일하다”며 “비슷한 시대 모자라고 해도 극의 분위기를 잘 살리면서 배우에게도 잘 어울리는 모자를 직접 디자인하기 때문에 같은 모양의 모자는 없다”고 말했다.
샤뽀의 모자 디자인은 조 대표의 아내인 ‘셜리 천’ 디자이너실장이 도맡아한다. 천 실장은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모자전문학교를 졸업한 능력자다. 조 대표 부부는 디자이너와 국적 불명 등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입 모자들만 넘쳐나는 국내 패션모자 시장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제대로 된 국산 패션모자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1999년 삼청동 정독도서관 옆에 작은 가게를 연 것이 샤뽀의 시작이다.
천 실장은 “90년대 후반에 한국에 돌아와보니 모자 회사는 많지만 패션디자인의 정체성을 가진 곳은 없고 주로 저가 수출형이나 카피 제품들을 생산하는 곳이 많았다”며 “모자 매니아들과 영화·드라마 소품 관계자들은 부르는 게 값이 돼버린 왜곡된 가격의 수입 모자를 ‘울며 겨자먹기’로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직접 원단을 마련해 디자인한 ‘삼청동 수제 모자’는 조금씩 입소문을 탔다. ‘소량 다품종’ 전략으로 세상에 단 몇 개 뿐인 특별한 모자란 메시지는 모자 매니아들을 사로잡았다. 2~3만원대의 평균 모자가격을 훌쩍 넘는 6~10만원대였지만 한번 루이엘 모자를 써본 고객은 단골이 됐다. 루이엘 브랜드 모자는 현재 백화점에도 입점했으며, 모자 단일 브랜드로 연 매출 5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모자의 역사적 발전에 따른 명품 브랜드화’ 논문으로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조 대표에겐 모자가 지닌 오랜 역사와 스토리를 활용해 콘텐츠 사업을 만들겠다는 비전이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패션잡화가 바로 모자이고, 잠재적인 콘텐츠도 그만큼 많다고 생각해서다. 전주에 사비를 들여 모자박물관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사람들이 착용하는 모자는 양반들이 쓰던 갓을 포함해 4,000종이 넘었고 ‘동방 모자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생활 속에 모자 문화가 녹아있었다”며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조선 팔도를 유랑하면서 그린 그림 속 사람들의 무려 95%가 모자를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세계 모자 물량의 70%를 우리나라 기업이 생산하는 만큼, 모자 시장의 주도권은 대한민국 회사들이 장악하고 있고 수출량도 많지만 제조·유통 규모에 비해 콘텐츠 쪽으로의 발전은 더딘 것이 사실”이라며 “품질이나 기술력 등의 요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방 따라잡힐 수 있지만 전통이나 콘텐츠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질 수 있기에 모자 콘텐츠 사업 확장에 꾸준히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